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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수강은방학때 Sep 09. 2019

산티아고 순례길 32일차

펠레스 데 레이(Palas de Rei) - 아르주아(Arzúa)

32일차


30. 펠레스 데 레이(Palas de Rei) - 아르주아(Arzúa) (28.13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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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찾아 헤매었던, 꿈에서라도 잊지 못했던,

눈앞에 아른거리던, 그 어느날을 기억하니 넌

우리가 다짐했던 건, 질끈 동여맸던 건, 그게 무엇이었건, 뜨거웠었고.

태양을 겨냥했었던, 숲을 꿰뚫었었건,

다만 타오르던 가슴에서 터져 나오던 

이제는 모두 어디에”


김동률 - 우리가 쏜 화살은 어디로 갔을까


-


이 길의 끝에서 삶의 답을 알 수 있을까

아니, 답에 대한 힌트라도 어렴풋이 알 수 있을까

애초에 삶에 답이 있기는 한 걸까

이 길처럼 삶에도 결국에 도착하는 목적지가 있는 걸까

그걸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의미를 찾는 수밖에 없나

그래서 별것도 아닌 일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잠깐 스쳐간 인연을 하루종일 생각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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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섯시쯤 출발했다. 걸음을 멈출 때마다 달아오른 피부를 차가운 공기가 빠르게 식혔다. 아침노을이 주변을 서서히 밝히기 시작했고 주변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앞서 순례길을 걷고 있었다.

걷다 보면 굴다리나 다리 밑을 지나가는 경우가 자주 있는데, 이런 곳은 항상 낙서들로 빼곡하다. 이때마다 앞서 사람들이 남긴 낙서를 읽는 것도 꽤 재밌는 일 중 하나다.


오늘 걸었던 길은 이렇게 나무가 양옆에 드리워진 길이 많았는데, 따가운 햇빛을 가려주면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한걸음 한걸음마다 기분 좋게 내딛을 수 있었다.


며칠 전부터 봤던, 강아지와 함께 걷는 외국인을 또 만났다. 이전에는 품에 강아지를 안고 걸어 다녔는데, 오늘은 강아지도 같이 길을 걷고 있었다.

주인을 따라 총총 걸음질 치는 강아지가 너무너무 귀여웠다.


가는 길에 만난 야옹이한테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고양이 밥을 줬다. 밥을 주면서 쓰담쓰담하기도 했는데 얘는 나보다 밥에 관심이 훠얼씬 많은 친구였다.


느린 걸음을 재촉하는 듯 어느새 해는 중천에 이르렀고, 그쯔음 외국인 부부 한쌍이 나를 지나쳐갔다. 저렇게 오랫동안 알고지내고 사랑했던 두 사람은 이 길을 걸으면서 서로 어떤 이야기를 나눌까?


이쁜 다리를 건너 다음 마을로 진입하고, 가는 도중 들르려고 했던 젤라또 가게에 이르렀다. 그런데 우리가 도착했을 때 가게문은 닫혀있었다. 영업시간도 나와있지 않고, 하염없이 기다릴 수도 없어서 바로 앞에 있는 마트로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그런데 잠시 후 가게 종업원이 와서는 30분 후에 가게를 연다고 이야기해줬다. 그렇담 당연히 기다려야지.

가게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있던 우리가 불쌍해 보였는지 15분 정도 일찍 문을 열어줬다. 너무너무 맛있어 보이는 젤라또들 중에서 바닐라와 망고맛을 골랐다.

기분 탓인지, 정말 맛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진짜 맛있게 먹었다. 오길 잘했어, 생각했다.


바에서 몇 번을 쉬고도, 길가에 있던 노상에서 산딸기와 체리를 사 먹었다. 걸으면서 먹는 과일은 왠지 모르게 더 맛있다.


숙소에 거의 다 도착해서는 비가 내렸다. 건물 밑에 잠깐 비를 피하면서 Covered in rain 노래를 들었다. 곧 비가 조금 잦아들었고 얼마 남지 않은 숙소까지 비를 맞으며 걸어갔다.


숙소 바로 앞 마트에서 간식을 사고 잠시 쉬다가 근처 피자집에 갔다. 여섯 명이서 피자 세 판을 시켰는데 피자 한판이 엄청 커다랬다. 맥주와 피자로 저녁을 때우고 숙소로 돌아와 또 맥주를 마시면서 일기를 썼다.


이제 산티아고까지 남은 거리는 40킬로도 채 되지 않는다. 내일은 일행들과 떨어져 혼자 다른 마을에 가기로 했다.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마지막 날 조금 더 걸으면서 지금껏 늘어놓은 생각들을 하나하나 주워 담고 싶어서.


내일과 모레는 정말 이런저런 생각들을 많이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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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ergue Pensión Cima do lugar


까미노 어플에 없는 알베르게라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다. 주방은 따로 없지만 커피포트와 전자레인지, 냉장고는 구비돼 있다.

바로 앞 일분거리에 피자집과 마트가 있어서 편하다.

다만 가격이 12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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