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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수강은방학때 Sep 10. 2019

산티아고 순례길 33일차

아르주아(Arzúa) - 라바코냐(Labacolla)

33일차


31. 아르주아(Arzúa) - 라바코냐(Labacolla) (28.27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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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으로 가는 여정에는 정해진 길도 노란색 이정표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 산티아고를 향해 걷지만, 당신의 걸음은 당신의 내면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이 길은 곧 끝나겠지만 그 걸음은 멈추지 않길 바랍니다.

Always&All ways

Buen Camino.”


SJ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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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 길 위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따뜻한 미소를 남겨준 사람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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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시 조금 넘어서 일어났다. 먼저 일어난 일행들이 이미 출발 준비를 마치고 밖에 있었다. 잘가라고, 내일 산티아고에서 다시 보자고 인사를 하고선 아침으로 도넛과 오렌지 쥬스를 마셨다.


밖으로 나와보니 아직 해가 뜨기 전이라 오랜만에 랜턴을 킨 채 길을 걸었다. 도착 하루 전날이라 이런저런 잡생각들이 많이 들 줄 알았는데 별로 그렇지도 않았다.

걷던 길 한복판에서 쓰다듬어달라며 발라당 누워있던 개들을 만났다.


오늘은 여러 마을과 숲길을 걸었는데, 어느 순간에는 주변에 꽃들이 엄청 많았다. 갑자기 들어선 꽃길에서 두리번거리며 이쁜 길을 사진 속에 담았다.

적당한 타이밍에 만났던 바에서는 먼저 출발했던 일행들을 다시 만났다. 내일 보자며 인사했는데 왜 아직도 여기있어?

곧 일행들이 먼저 자리를 뜨고 다시 혼자 남아 커피와 초코케익을 먹고 있는데, 검은 강아지 한 마리가 가게 문 앞에서 나를 쳐다본다. 나랑 같이 갈 것도 아니면서.


다시 길을 걷는데 또 강아지들을 만났다. 오늘은 왜 이렇게 강아지들을 많이 보는지. 주인이 있는 개인 줄 알았는데, 옆에 앉아있던 수도승 같은 복장을 입은 외국인분이 “이 개도 까미노를 걷고있나봐요.” 하고 이야기해준다. 아... 아저씨 개 아니었어요?


걷는도중 오른쪽에 있던 문에는 이런저런 낙서가 적혀있었는데, 까미노 길 위에서 ‘응니엄마’를 볼 줄이야. 그 낙서 사진을 찍고나니 도로편으로 아까 만났던 강아지가 뛰어온다. 너 진짜 혼자서 까미노길 가는거야?

강아지는 바로 앞, 수국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곳에서 멈춰서더니 그 이후로는 만날 수 없었다.


걷다가 또 개를 만났다. 쎄요를 찍을 수 있는 작은 책상이 있던 곳인데, 귀여운 아이는 몇 번 쓰담쓰담해줬더니 내 냄새를 맡으면서 부비적거린다.

나무가 늘어서있는 숲길을 지나고 언덕 위 꽃밭에 있던 집을 지나 다시 바에서 쉬었다.

파나나를 먹고나니 졸음이 몰려왔다. 이십분 정도를 꾸벅꾸벅 졸다가 다시 출발했다.


다시 걷기 시작하자마자 작은 굴다리를 만났다. 여느 때처럼 벽에 적혀있는 낙서를 구경하며 걷는데, 유독 한글로 써있는 낙서가 많았다. 걸음을 멈추고 하나하나 읽었다. 이제 20킬로도 남지 않은 이 길 위에서 사람들은 어떤 방명록을 남겼을까,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진심 묻어나는 글들을 읽으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나는 처음 이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이 길 위에서 아쉬움을 하나도 남기지 말아야지,하고 생각했다.

길 위에서 모든 걸 보고 듣고 느껴서, 길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에는 ‘난 이 길 위에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걸 느꼈어. 그래서 난 하나도 아쉽지 않아.’ 하고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하염없이 천천히 걸었고, 때로는 제자리에 앉아서 꽤 많은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기도 했다. 가끔 아주 작은 생각의 끈을 하루종일 잡고 늘어지기도 하면서.

하지만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 아기를 데리고 걷던 사람, 만날 때마다 웃으며 특유의 말투로 인사를 건네주던 사람, 마주칠 때마다 항상 먼저 안부를 물어봐주던 사람, 그냥 스쳐갈 뿐이지만 매일매일 스쳐 지나갈 때마다 서로를 알아보며 웃으며 인사를 주고받던 사람, 반갑다며 먼저 이름을 묻고 악수를 청해주던 사람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때 그 사람들이 전해주던 마음은 그 순간에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큰 마음들이었다. 그래서 그 착한 마음들은 내가 걸어왔던 길 위에 조금씩 넘쳐흘러있었고, 이제와서야 그 마음을 다 담지 못한 아쉬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걷다보니 조금씩 도시에 가까워지는 느낌이 든다. 공항 옆을 지나기도 하고, 고속도로 옆을 지나오기도 했다.

혼자 일행들보다 6킬로 먼 마을에서 멈췄다. 내일 너무 짧은 거리를 걸으면 급하게 마무리를 짓는 느낌이 들까봐.

내일은 진짜 마지막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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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vacolla Hostel


큰 방에 여러 침대들이 한꺼번에 있다. 그래도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고, 주방이나 휴게 장소들이 넓고 잘 준비되어 있다. 근처 피자집에서 피자배달을 시킬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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