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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수강은방학때 Sep 10. 2019

산티아고 순례길 34일차

라바코냐(Labacolla) - 산티아고(Santiago)

34일차


라바코냐(Labacolla) - 산티아고(Santiago de Compostela) (10.3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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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여라. 진정한 길은 그것이 끝났을 때 비로소 시작한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례자여.”


Zabaldika 성 스테파노 성당 ‘순례자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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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시가 넘어서 일어났다. 천천히 준비하고 출발 전에 숨을 골랐다. 어질러놓은 내 책상처럼 그동안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던 생각들을 주섬주섬 주워 담으며 걷기 시작했다.

천천히 걷다 보니 눈에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둘씩 지나간다. 마지막 날인 만큼, 서로 주고받는 인사가 가볍지만은 않다.


이 길을 처음 걷기로 결심했을 때, 혼자서 세웠던 목표가 있었다. 목표라고 하기엔 좀 그렇고, 내가 걷는 순례길의 제목 같은 거.

현실과 이상의 간격을 최대한 줄이기.

만약 둘 중 하나라도 쓸모없다고 생각이 드는 순간이 오면 과감하게 하나를 포기하자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현실과 이상, 이성과 감성은 이분법적으로 딱 구분이 되는 게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는 말랑말랑한 속을 딱딱한 껍질이 감싸주고 있는 느낌이랄까.

상처 받기 쉽지만 없어서는 안 될 이상을, 딱딱하지만 소중한 것을 보호해주는 현실이 둘러쌓고 있다는 생각.


그러니 두 가지 모두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현실이 모자라면 작은 스침에도 아파 우는 멍청이가 될 수도 있고, 이상이 모자라면 속 빈 강정처럼 텅 빈 사람이 될지도 모르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산티아고 도시에 들어왔다. 도시 입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라고 적혀있던 조형물에는 사람들이 놓고 간, 이제는 곧 필요 없어질 물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산티아고 성당 주변에는 구경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가게들도 많았고,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 동상처럼 서있는 사람도 있었다.

하얀 차림으로 가만히 멈춰있던 사람은 내가 동전을 하나 떨어트리니 가까이 오라며 손짓한다.

고맙다면서 어디서 왔는지 물어본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 두루마리를 꺼내 건네주고서 다시 원래 자세로 멈춰 선다.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했다. 유명 관광지에 온 것처럼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맨 처음 길을 시작할 때는 이곳에 도착하면 어떤 벅차오름이나 감동 같은 게 있을 거라 기대하기도 했었는데, 며칠 전부터는 아마도 그러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예상대로 별 감흥이 없었다. 길을 끝마쳐 신나지도 않았고, 그간에 마음고생이나 아쉬운 마음에 눈물이 나지도 않았다.


그냥, 길이 끝났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 앞으로는 일상으로 돌아가야겠구나, 돌아가서는 이 길을 걸으면서 배웠던 가치들, 느꼈던 좋은 마음들을 이정표 삼아 다시 일상을 살아가야겠구나, 생각했다.

순례길 여정은 끝났고, 이제는 노란색 이정표가 없는 일상으로 돌아가 다시 내 길을 걷기 시작해야 된다고.

그런 생각이 요 며칠 전부터 들었다. 그래서 별 감흥이 없었다. 이제 진짜 길로 돌아가 걷기 시작하는 거니까. 대신 이 순간을 나만의 방식으로 기억에 남겼다. 마치 쎄요를 찍듯이.

이 길을 걸으면서 기록해두었던 참고서를 앞으로 살아가면서 가끔씩 펼쳐볼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그때 그 기억들이 다시 되살아나면서, 어려운 순간에 노란 이정표를 다시 보여줄지도 모를 테니.


먼저 도착해있던 일행들과 만나고 예약해두었던 숙소로 갔다. 짐을 풀고 바로 각자 흩어졌다. 쇼핑을 하러 가기도 하고, 버거킹에 가서 햄버거를 먹기도 하고, 은행에 가서 출금을 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저녁에 다시 모여서는 같이 마트에 갔다.

무사히 순례길을 마친 서로를 축하하기 위해 술을 엄청 많이 샀다. 이제 앞으로는 걸을 일이 없으니까. 맥주며 와인이며 양주까지.

그렇게 밤까지 다같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각자의 크레덴시얄을 돌려가면서 서로에게 짧은 편지를 남겼다.


그리고 지난번 부르고스에서 헤어졌던, 미국에서 사업을 그만두시고 아들과 순례길을 오셨던 앤드류 아저씨를 다시 만나기로 했다. 일정이 빠듯하다고 먼저 버스를 타고 앞서 걸어 다시 못 볼 줄 알았는데.

밤 열시 반에 만나기로 하고 시간에 맞춰 성당 앞으로 갔다.


가는 도중에 근처 레스토랑 테이블에서 연주소리가 들리길래 잠시 들렀다. 여러 명의 아저씨들이 각자 악기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꽤 많은 사람들이 주변에 모여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만약 소설가가 이 장면을 보았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비슷한 분위기와 감정을 전해줄 수 있었겠지만, 내 생경한 글 실력으로는 그 장면과 감정을 고스란히 전하기엔 너무 어렵다. 다만, 그 모습을 보면서 만약 ‘낭만’이란 단어를 처음 정의해야 된다면 이 장면을 그대로 보여주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밤에 보는 대성당의 모습은 낮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태양은 저물었고 잔잔한 조명에 비춰지고 있는 성당은 그간의 세월을 잠깐이라도 짐작해보라는 듯이 가만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오랜 세월 동안 이 자리에 서 있었을, 수많은 순례자들이 지금 이 자리에서 느꼈을, 그래서 남기고 갔을, 마음 더미에 내 마음 한조각도 슬며시 남겨두었다.


광장에서 그동안 길 위에서 만났던 반가운 얼굴들을 다시 만났다. 껴안으면서 서로를 축하해주고, 동시에 아마도 마지막일 우리의 인연을 가슴에 묻었다.

날이 쌀쌀해지면서 우리는 다시 숙소로 돌아왔고, 그동안 아침형 인간들이었던 우리들은 새벽을 얼마 새지 못하고 각자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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