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가 서로에게 운명이 되어가는 과정
여행을 다녀온 후, 오랜만에 들른 강남 교보에서 사 온 책이다. 여행을 다니면서, 인터넷에서 읽었던 이 책의 몇 가지 구절들이 기억에 남아있었다. 덕분에 서점에 갈 때마다 무슨 책을 살까 고민하던 필요 없이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세계문학을 주로 읽다 보면 우리나라 작가들이 쓴 책을 읽어 볼 기회가 별로 없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을 읽으면서 문장 하나하나 표현에 집중해 읽었다. 주인공의 심정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주인공이 풍경을 따라가는 시선은 어떤 식으로 표현되고 있는지. 가장 기억에 남는 표현은 정윤이 명서에게 고백하는 대사다.
— 이제는 그 시골 마을도 수돗물을 사용해. 우물은 덮개로 덮여 있어. 그 집에 가게 되면 덮개를 걷어내고 우물 속을 들여다봐. 아직도 저 깊은 우물 속에 물이 찰랑찰랑 고여 있어. 그것을 내 눈으로 확인하게 되면 기뻐. 내가 본 최초의 물이 마르지 않고 있다는 게 안심이 돼.
— ......
— 그 물을 들여다볼 때만큼 너를 좋아해.
— 보기에는 허술해 보이는 물길인데 여름날 장맛비도 잘 실어날랐어. 가끔 말이야, 그 물들이 어디까지 흘러가나 궁금해서 그 물길을 따라가봤어. 들판을 건너게 되고 철길을 건너게 되고 그러고도 또 끝없이 이어지는 들판과 마주치게 되곤 했어.
— ......
— 그 끝없는 물길만큼 좋아해.
같은 단어를 알고 같은 문장을 이해할 수 있다면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고 하던데, 이 책 속의 이런 표현들을 읽다 보니 새삼스레 그 말이 다시 떠올랐다.
우리나라 문학을 읽다 보니 외국 문학을 읽을 때와 달리 소설 속 사회적 배경이라든지, 등장인물들이 쉽게 머릿속에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그 덕분에 더욱 쉽게 소설에 빠져들 수 있었다. 작가는 우리말로 씌여진 아름답고 품격 있는 청춘소설을 쓰고 싶어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존재의 충만과 부재, 불안과 고독의 순간들을 어루만지고 함께해주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70-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결코 밝지만은 않다. 직접적으로 어둡거나 칙칙한 분위기가 묘사되지는 않지만,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이나 대사를 읽다 보면 마치 '창문에 검은 도화지를 붙여둔 방 안에 있는 듯'한 분위기에 빠져든다. 그런 상황 속에서 주인공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운명이 되어가는 과정은 애틋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안타깝기도 하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에 이입하기가 참 어려웠다. 윤이, 미루, 명서, 단이 그리고 윤교수까지 서로가 서로에게 단순한 인연이 아니라 각자 삶에 있어 하나의 의미, 그 이상의 가치로써 작용한다는 것. 그래서 상대방이 부재했을 때, 남겨진 사람이 느끼는 상실감이나 슬픔, 그리움을, 그런 사람을 그런 상황을 겪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사실 난 이 책을 다 읽었으면서도 하나도 읽지 않은 느낌이다. 그저 우리나라 글이 표현할 수 있는 문장과 상황들만 눈여겨보았을 뿐. 그저 작가가 보여주는 장면과 대사들만 지켜봤을 뿐, 그 속에 작가가 전하고자 했던 가치나 감정들을 전해받았으면서도 느껴보지 못한 느낌이다. 나중에 다시 이 책을 읽었을 때는, 내.가.그.쪽.으.로.갈.까. / 내.가.그.쪽.으.로.갈.게. 이 두 문장 사이에 쌓여있는 그 마음들을 헤아릴 수 있기를.
— 우리는 무엇엔가에 의지해서 이 강물을 건너야 해. 그 무엇이 바로 여러분이 하고자 하는 문학이니 예술이니 하는 것들이기도 할 테지. 지금 여러분은 당장 그것이 여러분을 태워서 저쪽 언덕으로 건너가게 해주는 배나 뗏목이 되어줄 것으로 생각할 거야.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것이 여러분을 태워 실어나르는 게 아니라 반대로 여러분이 그것을 등에 업고 강을 건너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 살아 있으라. 마지막 한 모금의 숨이 남아 있는 그 순간까지 이 세계 속에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살아 있으라.
— 바래긴 해도 잊히지 않아. 그러니 자네들보고 잊으라고 하지는 않겠네. 생각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더이상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생각해. 이 부당하고 알 수 없는 일에 대해 질문하고 회의해. 그때 나는 뭘 했던가? 하는 자책이 일생 동안 따라다닐걸세. 그림자처럼 말이네. 사랑한 것일수록 더 그럴 거야.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절망할 줄 모르면 무슨 의미가 있겠나. 다만...... 그 절망에 자네들 영혼이 훼손되지 않기만을 바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