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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황 Oct 30. 2018

-제 2장-양옥집과 반지하 그리고 필로티 구조의 건축사

2018년 현재 서울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두 가지 형태의 건물은 아파트와 필로티 구조의 빌라다. 필로티 구조의 빌라는 근 20년 사이에 부쩍 늘어나 요즘 지어지는 소규모 주택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70년대에 지어진 이른바 양옥 단독주택과 다가구주택의 자리를 빠르게 대체하고 있는 필로티 구조의 빌라는 5층 정도의 높이에 1층엔 주차장을 위해 주거 공간을 최소화 하거나 없애버리고 철근 콘크리트 기둥이 건물을 지탱하고 있는 형태다. 가장 많이 눈에 띄는 형태는 5층 중 네 개 층에 각각 두 세대가 거주하는 형태로, 한 개의 세대가 있는 경우도 많다. 이 과정에서 반지하-지하가 사라졌다는 것이 주목할 만한 지점이다. 보통 오래된 양옥집이나 다가구주택을 허문 자리에 이런 형태의 빌라를 새로 짓고 있으며, 서울 전지역의 아파트 단지를 제외한 주거단지에서 현재도 공사가 진행 중인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건축법 상 다가구주택의 허가 기준은 지하를 제외하고 3층 이내여야 하면서 각 층 바닥 면적의 합이 660㎡-200평 이하여야 하는데, 이런 건물에 최대 19세대까지 나누는 것이 허용된다. 때문에 아주 좁은 면적이 한 세대에 할당되고, 임대료가 저렴하기 때문에 주로 중위소득 이하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거주한다. 이런 좁은 주거공간의 확산은 결과적으로 건축법이 주도하고 있다고 읽어도 큰 무리가 없다.


‘양옥집’이라고 부르는 가옥은 197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50년대 초반에 벌어진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국토를 박정희 정부의 주도로 개발하는 과정에서 지어진 새마을주택을 시작으로 불란서주택의 인기와 더불어 지하층에 지상 2층, 담장과 정원 그리고 1층보다 작은 면적의 2층 구조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테라스가 있는 전형적 단독주택으로 이어졌다. 한국의 단독주택들은 조선시대 기와집이나 초가집 등에 비해 딱히 마당의 규모를 넓힐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이는 일본식 주택의 작은 정원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70년대에 강남 개발이 시작되면서 아파트 단지라는 새로운 형태의 주거 밀집지역이 생겨났다. 그 사이에 강남 개발 열풍에 뛰어들지 않은 사람들 중 한국전쟁 후 재산 확보에 성공한 사람들은 강북 곳곳의 마을에 모여 단독주택을 짓고 살았다. 서울이 대도시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면서 돈을 벌기 위해 상경한 사람, 강남 개발로 주거지를 옮겨야 했던 사람을 비롯해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1980년대를 맞이했다. 그런 과정에서 시작된 것이 도시 빈민의 주거 해결책으로 단독주택의 다가구화가 진행됐다. 어떻게 한 세대가 살 수 있도록 지어진 주택에 다른 가구들이 들어오게 되었는가 하면, 단독주택의 보일러실이나 창고로 쓰이던 반 정도 지하에 위치한 공간들을 사람이 기거할 수 있는 방으로 고쳐 세입자들을 들일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다. 여기서 반지하가 시작된다.


일본식 정원을 본따 단독주택의 마당을 꾸몄을 때는 집집마다 감나무나 향나무나 라일락 등을 심고 각종 꽃 등의 관상용 작물들을 키웠지만 머지않아 거의 모든 단독주택 거주자들은 정원을 포기했다. 그걸 관리하는 문화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여전히 농경사회였고, 농사는 관상 같은 것과 무관한 실질적이고 합리적인 영역이다. 때가 되면 깎아야 하고 잡초를 뽑아야 하는 잔디를 심는 이유는 순전히 미관을 위해서였는데, 이런 것을 바라보고 가꾸며 삶의 또다른 기쁨을 만끽하는 것은 조선에도 없었을 뿐더러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도 전파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람들은 하나둘씩 집에 있던 정원을 포기하기 시작했다. 문화운동가 손이상의 페이스북 글에 의하면 가장 먼저 포기한 것은 작은 연못이었을 거라고 한다. 물론 당시의 주거 문화 변천 과정을 다룬 역사서나 문헌 따위는 없으므로 추론할 수밖에 없다. 재미있는 추론인데, 여기에 조금더 보태자면 가장 먼저 관리 부실의 연못을 포기하면서 동시에 잔디를 벗기고 땅을 다진 후 시멘트를 부었을 테다. 회색 바닥이 갈라진 틈에서 이따금 잡초가 자라긴 했지만 문제가 될 건 없었다. 비가 와도 질척거리지 않았고 다음날이면 말끔하게 건조됐다. 정원을 구성하던 관상용 식물들은 사라졌지만 정원에 있던 흙을 이용해 스티로폼 화분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심었다. 상추나 고추, 토마토나 파 같은 것들이다. 나는 이를 가꾸는 것에서 재배하는 것으로 회귀한 것으로 해석 중이다.


단독주택의 꿈은 알량했다. 조선이 끝나고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정치적 이념 전쟁에 휘말렸던 스트레스의 역사가 막 끝난 시기에 드디어 일상이라는 것을 제대로 꾸릴 수 있게 됐던 한국인들에게 단독주택은 어쩌면 개인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기회를 소개시켜 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왕이 지배하는 사회에 사는 소유물로서의 백성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논리를 주입 받아야 마땅한 식민 사회의 자원이 아니라, 지식인들이 이끄는 정치 이념이 권력과 혼합돼 발생한 공간 장악의 싸움에 휩쓸리는 국가에 속박 당하는 국민이 아니라, 드디어 민주적인 기회를 발판으로 땅을 사고 집을 짓고 가정을 꾸리고 사적인 시공간을 가꾸며 날씨와 햇볕과 계절 말고는 침범하는 일이 없는 단독 소유, 단독 주거의 주택은 한국인들을 사회적으로 동원되는 군중에서 근대 이후의 개인으로 해산시킬 수 있는 구실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야 마땅한 도시 빈민의 주거 대책 마련에 동원되면서 단독주택의 꿈은 무너지고 말았다.


반지하의 삶은 최소한의 삶을 의미했다. 반지하에 살기엔 무엇보다 한국의 사계부터 혹독했다. 여름의 장마와 태풍이 몰고다니는 빗줄기는 최소한의 삶을 사는 반지하의 삶을 집중적으로 괴롭혔다. 반지하의 삶은 그럴 때면 가장 먼저 피해를 입고 가장 나중에 원상복구 됐다. 비가 내리지 않는 날은 공기중의 습기가 반지하 방 안쪽 육면을 곰팡이가 잠식하도록 부추겼다. 곰팡이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겨울엔 연탄가스의 위협에 언제나 노출되어 있었다. 혹독한 추위를 날 수 있는 유일한 난방 방법은 연탄 뿐이었다. 연탄이 불완전 연소되면 일산화탄소를 만들어낸다. 연탄 아궁이에서 피운 연탄불은 더운 공기를 방바닥에 온돌 형식으로 전달하는데, 시멘트 바닥에 균열이라도 생기면 연탄 가스가 방안을 채웠다. 공기보다 무거운 일산화탄소는 반지하에 잠든 이들의 몸을 짓눌렀다.


나는 이때부터 한국의 주거-건축 문화에서 ‘인간’이라는 개념이 빠진 것으로 읽고 있다. 인간이 사는데 필요한 일조량, 한 사람이 사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면적, 인간과 인간이 서로의 사생활을 침해하지 않고 서로에게 필요한 일조량과 면적을 확보하기 위해서 건물과 건물 사이의 공간은 얼마나 떨어져야 하는지 등은 그때부터 고려되지 않아 현재를 경유해 미래로 흐르고 있다. 지자체의 도시 계획에 이런 것들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오로지 얼마나 경제적 이득을 꾀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연구한다. 필로티 구조의 빌라들이 아무런 미학적 고민 없이 열심히 지어지고 있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좁은 땅에 최대한의 사람을 모여 살게 만들어야 하는데, 한국인들은 웬만하면 차를 한 대씩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염두한 건물이다. 무엇보다 정원이 포기된 자리에 시멘트가 부어진 것, 관상용 식물을 포기하고 먹을 수 있는 채소를 재배한 것은 한국 사회가 ‘집’을 규정하는 것을 정확하게 상징한다.


전형적인 양옥집. 1층과 2층의 가구를 나누면서 외부 계단을 추가로 설치한 모습이다. 이미지 출처 : https://3dwebtoon.com/product/untitled-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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