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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황 Aug 15. 2019

소녀상, 그 문제적 이미지에 관하여

어떤 사건의 비극을 예술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소녀상>은 어떤 예술적 고민을 통해 소조된 형상일까? 우리는 그 단서를 이 형상 자체에서 찾을 수 있다. 단발 머리를 한 10대 중반으로 보이는 치마와 저고리를 입은 여성 좌상. 단발의 머리카락과 주먹쥔 손, 뒷꿈치를 든 발과 어깨의 새, 그림자와 나비 등을 피해, 단절, 의지, 연결 등과 연관짓지만 그런 것은 이 형상을 통해 우리가 마주쳐야 하는 미학적 문제와 비교하면 맥거핀에 지나지 않는다.


그보다 우리는 <소녀상>이 취한 '소녀' 자체의 이미지와 그 이미지가 함의한 태도에 좀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분명하게도 대중에게 소녀는 미성년, 즉 덜 성숙한 상태의 인간, 또한 아직 보호와 교육을 더 받아야 하는 상태의 인간, 나아가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상태의 인간을 의미한다. 소녀에 대한 이런 태도의 해석을 부정하면서 모든 표현이 그렇지 않음을 주장하려 시도하는 이들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대중에 의해 아주 쉽게 기각될 것이 분명한 주장이다.


김운성, 김서경 작가의 <소녀상>


소녀의 이미지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면 이제 위안부, 즉 성노예 피해자를 소녀의 형상으로 표현한 것이 우리의 감상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살펴볼 차례다. 어떤 비극적 상황에 놓여 고통받는 이를 카메라에 담는다고 치자. 이를테면 굶주려 죽기 직전에 놓인 아프리카 극빈국의 한 아이를 촬영한다고 말이다. 이 사진을 감상하며 우리가 느끼는 일련의 안타까운 감정은 아이라는 존재의 나약함과 그 나약한 생명에 뚜렷하게 연결된 죽음을 연상하며 나타난다. 이 사진은 우리로 하여금 구체적으로든 막연하게든 '아이가 죽는 장면'을 상상하며 느끼는 감정들을 유발시킨다. 바로 이런 지점에서 문제를 포착해 확장하면 유니세프의 모금 광고 방식을 두고 비평할 수 있게 된다.


노동식 작가의 <희망고문>


이는 세월호를 기념하겠다며 '가라 앉는 중인 세월호'를 비교적 정밀하게 묘사한 이미지들이 가지고 있는 장치들과 정확하게 포개진다. 이를테면 노동식 작가의 입체 작업 <희망고문>은 뒤집힌 채 가라앉는 세월호의 선체를 사실적으로 만들어내며 관객으로 하여금 그 내부에서 겪어야 했던 일련의 고통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소녀상>은 위안부 피해자들이 '성노예'로서 입은 피해와 비극을 소녀라는 구체적 형상으로부터 상상하게 만들기도 한다. 어떤 비극적 상황의 피해자를 직접 호명하며 인체를 확연하게 묘사한 것은 그래서 그 자체로 비판 받을 지점이 된다.


국회에서 전시돼 여성혐오 논란이 일었던 이구영 작가의 <더러운 잠>


물론, 분명히 해두는데, 소녀상이 우리로 하여금 기능하는 것, 즉 분노와 슬픔과 연민 등의 감정을 유발해 우리를 행동하게 만드는 것, 일본의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그들로부터 사과를 요구하게 만드는 것이 의미 없다는 것이 아니다. 이 형상 자체의 미학적 문제점에 대한 고찰과 그 가치에 대해 따져보자는 의미다. 이구영의 <더러운 잠>이 박근혜와 최순실의 국정농단에 분노하게 만들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잖은가?


<평화의 발> 제막식 행사 보도 사진.


나는 마지막으로 지뢰 폭발 사고로 발목을 절단해야 했던 군인과 그 군인의 비극을 기리기 위해 제작됐던 <평화의 발>을 떠올려볼 것을 권한다. 그 기념비는 우리로 하여금 '발목이 절단되는 상황과 고통'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게 만들지 않았던가? 나아가 그 기념비의 제막식에 초대돼 휠체어 위에 앉아 우리와 똑같은 관객이 돼야 했던 피해 당사자의 처지는 어떠한가?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비극적 상황의 피해자들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에 대해, 예술은 기념비를 제작하며 피해자를 직접 묘사해야 했는가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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