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출신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대표작 <La trahison des images>는 당시 흔히 볼 수 있던 흡연용 파이프를 그린 그림에 ‘Ceci n'est pas une pipe’라고 적어 놓은 가로 60.33cm, 세로 81.12cm 크기의 유화 작품이다. 그림의 제목을 한국어로 풀자면 <이미지의 배반> 혹은 <이미지의 반란>정도의 뜻이고, 그림에 쓰인 문장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뜻이다. 나는 마그리트가 이미지와 대상 그리고 현실과 화면, 나아가 인식과 실체의 괴리나 틈,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고 언어로 표현하고 사고하는 과정을 오가는 복잡하면서도 아주 단순한 체계를 아주 간단하고 장난스럽게 드러냈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그건 파이프가 아니다. 파이프 그림일 뿐이다. 파이프가 아니라는 문장은 그것이 파이프로 보인다 한들 파이프는 아니라는 명료한 설명과 함께 이미지, 즉 어떤 대상과 인간의 언어 사이에 형성된 엉성한 관계에 대해서 폭로한다.
나는 개를 키우고 있다. 이 개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자면, 2012년 8월 10일에 태어난 수컷 골든 리트리버 종으로, 같은해 10월 3일에 나와 처음 만나 가족이 되었고 그 이후로 만 6년이 지난 지금까지 가족 구성원으로서 자신이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그 역할이라는 것은 거실에 누워 늘어지게 낮잠을 자다가 사료 그릇에 있는 사료를 우드득 소리를 내며 먹고는 옆에 있는 물그릇으로 고개를 돌려 정확히 세 번씩 혀를 사용하는 리듬으로 “첩, 첩, 첩” 소리를 내며 물을 마시고 화장실에 가서 오줌을 누고는 이내 기분이 좋아져서 어디선가 테니스공을 물고 와서 인간 식구의 손에 닿게 만들어 “이거 빼앗기 놀이 하자! 네가 술래야”라고 강요하다가 결국엔 한 시간 혹은 두 시간의 산책을 나가게끔 만드는 것이다. 정말로 특별히 너무 더웠던 지난 여름의 그 지독하게도 혹독한 구간 정도를 빼면 우리는 거의 매일 산책을 했다. 개와 함께 산책을 하기에 굉장히 좋은 커다란 공원이 하나 있고, 아마도 그 공원은 서울에서 가장 큰 공원일 테고, 거기서 우리는 천천히 걷기를 좋아해 크게 한 바퀴를 빙 돌아 거닐면 꼭 두 시간이 걸린다. 그동안 개는 곳곳에 남겨진 다른 녀석들의 흔적을 코로 성실하게 관찰하고 마치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에서 ‘좋아요’를 누르듯 한 쪽 다리를 들고 자기 오줌을 보태어 놓는다. 이렇게 한 바퀴를 도는 사이에 보통 네 번 혹은 다섯 번의 똥을 누는데, 처음 것과 두 번째 정도의 것은 단단해서 깔끔하게 치우기 좋지만 세 번째부터는 억지로 짜내는 똥인지 조금 묽어지기 시작해 마지막에 눈 똥은 비닐 봉투를 장갑처럼 끼운 상태에서 똥과 그 아래의 흙을 조금 같이 짚어야 깔끔하게 치울 수 있다. 몇 년이나 함께하면서 얻어낸 귀한 기술이다. 그러고 보니 지난 6 년 동안 녀석의 똥을 치우지 않았던 적이 두 번 뿐이다. 한밤에 산책을 하다가 똥을 잃어버린 경우였다. 인적도 드물고 가로등도 없는 시커먼 곳에서 볼일을 보면 시선을 떼지 않고 다가가 치워야 하는데 하필이면 전화가 오거나 하는 이유로 시선을 돌렸다가 그만 똥을 잃어버린 것이다. 스마트폰의 불빛을 가지고 30분 혹은 한 시간을 찾아봤지만 풀이 무성하게 자라 어둠을 단단히 설치한 탓에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테니스공을 세상 무엇보다 좋아하고 물만 보면 한강 물이든 미술관 뒤뜰의 조경으로 구성된 연못이든 세상의 모서리마다 고인 빗물 웅덩이든 일단 들어가 몸을 담구는 것을 즐긴다. 목욕 하거나 빗질을 하는 것을 못마땅해 하며 이따금 빗질 하는 손에 앞니를 가져다 대거나 손을 입 안에 넣어 무는 시늉을 하는데 그럴 때면 “넌 성격이 참 더럽구나...”하면서 엄지로 중지를 튕겨 알이 굵은 밤톨 같은 코를 한 대 때려준다. 그래도 사람 먹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서 식탁에 둘러 앉은 사람들이 무엇을 먹는지, 자기도 먹어도 되는 건지, 아니 자기는 언제 자리에 끼워 줄 것인지 참견하는 일이 그리 많지 않아 칭찬을 자주 듣는 편이다. 골든 리트리버들이 지능이 높다는 세상의 편견에 맞서고 싶은 모양인지 공을 던져서 가져다 놓고 다시 던지기를 기다리기 보다는 한 번 문 공을 좌우로 흔들며 신나서 으르렁 거리다가 “멀뚱 서있지만 말고 와서 빼앗아 보렴!”이라고 권유한다. 원반을 가지고도 그러고 페트병을 가지고도 그런다. 한 번은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 리모컨을 찾으러 다니기 귀찮아 녀석에게 ‘리모컨’이라는 단어를 가르치고는, 왜냐하면 ‘가져와’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리모컨 가져와!”하면 리모컨을 가져올 줄로 알고 그렇게 했다가 리모컨을 물고 온 집안을 돌아다니며 자기 멋대로 채널을 돌리는 통에 오히려 그걸 빼앗으려고 작은 소동을 일으켰던 적도 있다. 녀석의 이름은 루돌프다.
그렇지만 녀석과의 삶이 이렇게 익살 맞고 낭만적인 것만은 아니다. 기실, 한국의 대도시에서 큰 개와 함께 산다는 것은 어쩌면 온갖 불편과 편견과 질투와 투정과 짜증과 시기와 혐오 같은 감정들에 부러 노출되는 삶을 택한 것이다. 산책을 하다가 술에 취한 남자들이 “맛있겠다.” 하고 희롱하는 것을 적어도 세 번이나 겪었고, 그저 개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큰 개를 왜 공원에 데려오느냐!”며 시비를 걸어온 것은 셀 수 없이 많다. 그런가 하면 자기 아이를 데려와서는 “가서 만져봐!”라고 하는 부모들도 부지기수고 다짜고짜 산책로를 가로막고는 이어폰을 낀 나와 녀석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면서 “만져봐도 돼요?”라는 부탁을 하는 경우도 셀 수 없이 많다. 언젠가는 웨딩 촬영 중인 커플이 와서 개를 빌릴 수 있느냐고 물은 적도 있다. 게다가 이 지역엔 녀석을 지칠 때까지 마음껏 뛸 수 있도록 풀어 둘 수 있는 곳이 한 군데도 없으니 이건 거의 인간 전용 세계에 세 들어 살게된 이방인 처지나 다름이 없다. 그러다 뉴스를 통해 개가 사람을 물었다는 소식이 집중적으로 다뤄질 때면 이 세계의 주인을 자처하는 이들은 더 대담하고 더 공격적으로 이방인을 하대하고 박해한다. 물론 개가 사람을 무는 사고는 언제든 어디서든 일어나는 일인데, 마치 어느 시기에 부쩍 늘어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대는 언론과 기자들이 혐오스럽기는 가장 혐오스럽지만 말이다. 무슨 아이돌 그룹의 멤버가 키우던 작은 개에 물린 이후 병원의 안일한 대처가 더해져 감염으로 사망한 유명 식당의 사장 이야기를 전하던 언론들도 죄다 그모양이었다. 그런 사건이 있은 후로 일각에서 개에게 무조건 입마개를 씌우도록 강제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자 국무총리씩이나 되는 양반이 관련 규정을 만들자고 검토했고, 언론은 또 그런 이야기를 실어다 날라댔다. 이 여파가 얼마나 컸겠나? 사실은 잘 모르는 사람들이, 기사는 제목만 읽는 사람들이, 어디서 본 뉴스의 자막만 기억하는 사람들이 조용히 산책 중인 나와 개에게 한 마디씩 하고 지나갔다. 가장 좋은 방법은 대꾸 자체를 하지 않는 방법이지만, 나는 어떻게 하면 이 멍청하고 게으른 세계에 의연하게 대응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했고, 그 고민을 통해 기막힌 문장 하나를 고안해 냈다.
“이것은 개가 아니다.”
개의 사전적 의미는 ‘가축화된 늑대로부터 이어진 어떤 종, 학명으로는 카니스 라푸스 파밀리아리스, 식육목 개과에 속하는 동물’이다. 물론 우리는 이런 사전적 의미를 통해 개라는 동물을 개라고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시각정보, 즉 이미지를 토대로 개라는 동물을 개라고 인지하며 그렇게 인지한 개를 개라고 말한다. 몸이 짧거나 긴 털로 덮여있고, 짧거나 긴 꼬리가 있으며, 짧거나 긴 주둥이가 있고, 짧거나 긴 다리를 가지고 있다. 늘어지거나 선 귀를 가졌고 사납거나 순한 인상을 가졌고 검은색, 갈색, 크림색, 초코렛색, 회색, 흰색, 금색, 은색 등의 털색을 가지고 있다. 왈, 월, 멍, 뭐, 멈, 엉, 왕 등의 소리를 내어 짖고, 침을 흘리는 방법으로 체온 조절을 하는 탓에 혀를 내밀고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이미지를 가진 존재를 보면 개라고 인식하고 개라고 말한다. 그런데 과연 내가 루돌프를 데리고 산책을 하다가 "이렇게 큰 개를 왜 공원에 데려오느냐"며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과 마주쳤을 때, “이것은 개가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과연 위에 나열한 저 이미지를 가졌다는 것만으로 어떤 동물을 100% 개라고 부를 수 있는가에 대해 질문한다면 어떻겠냐는 말이다. 확실한 것은 내 옆을 걷다가 멈춰서 혀를 내밀고 꼬리를 흔들고 있는 루돌프가 다른 동물이 아니라 바로 개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상대방이라는 점이다. 이건 아주 획기적이고 효과적인 대응임과 동시에 상당히 철학적이고 교훈적이어서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를 낼 수 있는 기똥찬 처세술이기도 하다. 공원을 산책하는 어떤 동물과 주인을 불러 세워서는 “이렇게 큰 개를 왜 공원에 데려오느냐!”는 말을 굳이 꺼낸 사람이 있다면, 혹은 “이런 개를 공원에 데려오려거든 입마개를 씌워라!”라는 말을 굳이 꺼낸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나와 함께 걷고 있는 이 존재가 어째서 개인지를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존재가 개라는 것을 증명한 다음에 나에게 시비를 걸라고 어떤 순서를 지정해 주는 것이다. 만약 그가 이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여 증명을 시도하게 된다면, 그는 이내 누가 봐도 개인 동물을 보고 열심히 개라고 설명하고 있는 바보가 될 것이 뻔하다. 이 방법은 꽤 여러곳에 응용 가능하다. 멍청하고 게으른 세상의 주인들이 저마다 주인 행세를 하면서 난사하는 모든 편견 섞인 행태와 맞설 때 언제든지 쓸 수 있다. 이를테면 누군가가 “난민을 이곳에서 내쫒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가 가리킨 사람이 난민임을 먼저 증명하라고 하면서 스스로 난민의 존재나 난민의 문제에 대해 읊어대도록 유도한다거나 누군가가 “여자는 운전을 하면 안 돼”라고 한다면 그에게 여자가 무엇인지에 대해 먼저 정의하게 만들면서 스스로를 멍청하고 게으른 사람임을 증명하도록 만드는 거다.
*이 글은 미디엄에도 게재했습니다. https://medium.com/eltitnu/한국에서-개와-공원을-산책하는-방법-3d634bf0387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