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오픈 테니스 대회가 막을 올린 모양이다. 간밤에 한국인 선수 정현이 첫 경기를 했고, 텔레비전을 통해 중계됐다. 테니스 경기의 중계는 웬만해선 처음부터 끝까지 보기 힘들다. 일단 메이저 대회가 열리는 장소가 미국이나 호주, 프랑스, 영국이기 때문에 시차부터 고비다. 무엇보다 긴장감 넘치는 격렬한 경기가 이어지지만 선수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침묵하는 관중들과 함께 행여 세 시간을 넘기는 경우는 졸다가 소파에서 잠들기 일쑤다. 그래도 테니스 팬들을 설레게 만드는 선수의 등장은 생중계 관람을 시도해볼 만하다고 여기게끔 만드는 힘이 있다. 상대는 리투아니아 출신의 1990년생 리차르다스 베란키스. 랭킹은 104위. 정현이 23위니까, 사실상 몇 수 아래의 선수다. 체격 차이도 상당했다. 거의 190cm에 가까운 정현에 비하면 175cm인 베란키스는 왜소한 체격이다. US오픈에서 고작 2회전 진출이 최고 성적인 베란키스 입장에선 상당히 곤란한 상대를 만난 셈이다. 베란키스가 첫 세트를 가져갔지만 최근 부상 회복으로 상승세를 탄 정현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경기 도중 기권을 선언하고 짐을 싸게 됐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이 경기는 다른 테니스 경기와는 분위기가 조금 달라 흥미로웠는데, 베란키스가 더블 폴트를 하며 실점할 때나 베란키스가 리턴한 공이 코트의 라인을 넘어 실점할 때나 베란키스가 발리를 시도했다가 공이 네트를 넘지 못하고 실점할 때, 아무튼 베란키스가 실수를 범할 때마다 관중석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이 좀처럼 보기 드문 장면은 한국인으로 보이는 관광객 혹은 교민들이 만들어냈다. 그들은 연신 정현의 이름을 리듬감 있게 외치며 정현을 응원하면서 동시에 베란키스를 조롱했다. 테니스 경기에서 실수는 언제든지 나오는데, 실수가 나올 때마다 터진 함성과 조롱이 베란키스를 무너뜨리는데 일조했다. 이런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욕할 필요는 없다. 다만 테니스는 그동안 너무 신사적이었고, 그건 이런 인간의 천박한 본성을 부러 부정하는 태도에서 만들어진 일종의 문화적 합의였다고 생각하면 된다.
아시안게임이 한창인 요즘 가장 많은 주목을 받으면서 열기를 더하는 종목 두 개가 있다. 남자 축구와 야구다. 두 종목은 평소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대중 스포츠 중 하나다. 프로부터 아마추어까지, 직업으로 혹은 취미로 삼은 이들도 많다. 자연스럽게 아시안게임에서 남자 축구 대표팀과 야구 대표팀의 성적에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다. 남자 축구 대표팀은 4강에 진출한 상황이고 야구 대표팀은 두 번째 라운드에 진출한 모양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이 사뭇 흥미로워서 경기를 거듭할 수록 경기 자체보다 반응에 더 눈이 간다. 경기 도중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실수를 하거나 여러가지 상황이 만드는 컨디션 저하 탓에 부진하면 맹렬한 비난이 쏟아진다. 아시안게임 금메달에는 병역 혜택이 걸려있고, 대표팀의 대회 참가 이유 역시 곧 병역 혜택 확보로 이어지는 금메달 획득에 있다. 남자 축구 대표팀의 주장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토트넘 소속의 주축 선수 손흥민인데, 그는 대표팀이 정해진 성적을 거둬 병역혜택을 받은 지난 2012년 런던에서 열린 올림픽이나 2014년 인천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 참가하지 않은 탓에 이번 아시안게임이 사실상 병역 혜택을 받을 마지막 기회라고들 한다. 병역법에 따르면 특별한 사유가 생기지 않는 이상 손흥민은 내년에 병역의무를 이행해야 하고, 손흥민에게 막대한 연봉을 주고 있는 소속팀 토트넘은 한국 대표팀이 금메달을 따 손흥민이 병역 혜택을 받았으면 좋겠고, 손흥민 본인도 전성기 중 2년을 날려버리는 어이없는 상황은 맞이하고 싶지 않은 그런 상태인 거다. 그래서 누구보다 열심히 뛰고 누구보다 많이 뛴다. 비단 손흥민 뿐인가? 이번에 병역 혜택을 받으면 본인의 선수 생활에 상당히 유리한 상태가 되기 때문에 다른 선수들도 죽기 아니면 살기 식으로 뛰고 있다. 야구 대표팀의 경우는 아예 프로 선수들로만 팀을 구성해 노골적으로 병역 혜택을 노리고 나왔다. 사회인 야구나 대학 야구선수들로 이루어진 다른 나라의 대표팀과는 몸집 자체가 다르다. 금메달을 따는 것이 본전인 셈이니 반드시 금메달을 따야 하는 상태다. 실패할 경우 맹렬한 비난과 함께 병역의 의무라는 지독한 장애물이 다시 설치된다. 성공하면 본전이지만 실패하면 잃는 것이 너무 많으니 도전 자체가 불행이다. 하지만 아무도 이 불행한 도전을 말릴 생각이 없다. 금메달을 따서 끝내 병역 혜택을 받기를 응원하는 이들도, 군 면제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이들도 애초에 징병제를 존치할 것인가에 관한 논의를 할 생각은 못하고 그저 불행한 관객이 되어 이 비극을 더 극적으로 완성시킬 뿐이다. 국위선양이라는 신기루에 현혹되어 눈앞에서 펼쳐지는 거대하고 명확하고 뚜렷한 부조리극을 보며 함성을 지르고 목에 핏대를 세우고 환호하고 야유하는 이런 불행한 관객을 우리는 비난할 필요가 없다. 인간이 이렇게 지적으로 게으르고 나태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할 필요도 없다. 이런 초대형 스포츠 이벤트는 원래 그런 인간 군상의 면모를 드러내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면 된다.
한국인들이 잘 모르는 사실 중 하나가 바로 헌법을 근거로 개인의 SUV 차량을 국가가 징집해 전쟁 때 군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어길 경우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게 된다. 딱히 기준은 없고, 무작위로 추첨한 SUV 차량의 차주에게 ‘중점관리대상물자 지정 및 임무고지서’라는 아주 생소한 제목의 우편물을 보낸다. 자동차라는 것이 귀했던 1960년대에 만들어진 법인데, 2020년대를 바라보는 지금도 폐기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런 통지서를 받고 볼멘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세상의 절반을 구성하는 이들은 갑자기 국가주의자가 되어 이런 말을 한다.
“당연히 국가가 먼저지!”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흉볼 필요가 없다. 이럴 줄 알고 만든 법이겠거니 하고 넘어가면 되는 거다.
*이 글은 미디엄에도 게재했습니다. https://medium.com/eltitnu/한국에서-스포츠-중계를-보는-방법-6ab3294b9a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