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제학교에 적응하는 꿀팁 (1) : 영어(상)편에서 이어집니다.
둘째 딸 호지의 경우 이번 학년 영어시간에 '생쥐와 인간'을 읽었다. 영문학과를 나오신 한국 학부모중 한분이 "어머. 이거 내가 대학교때 전공 수업시간에 읽었던 책인데."라며 놀라워 하셨다. 책 분량은 짧았지만 내용은 만만치 않았다.
한 건도 아닌 두건이나 되는 살인에 대한 사실적 묘사, 대공황 시대 미 남부 지역의 척박하고 가난한 삶, 가감없이 적힌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 지능이 모자라는 남자 주인공을 대놓고 유혹하는 유부녀까지...
책의 결말에서 남자 주인공이 죽는 장면이 어찌나 슬프고 잔인하고 묘사되어 있던지 둘째 딸 호지는 울음이 터져나와서 줌 화면을 잠시 꺼야만 했었다고 고백했었다.
"나만 운거 아니야. 나 말고도 울먹 거리는 애들 몇명 더 있었어."
요새 한국학교의 문학 수업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 중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려 보면 국어와 문학 그리고 한문 시간까지 통털어서 나를 울린 건 고사하고 감동시킨 작품이 뭐가 있었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지금 다시 그 작품을 읽어본들 마찬가지일거 같다. 가보기는 커녕 이름도 모르는 남의 나라 산에서 물줄기가 '비류직하삼천척'으로 떨어지거나 말거나, 얄리얄리 얄량셩을 외치던 그 누군가가 청산에서 살거나 말거나, 규방의 친구들이 설령 일곱에서 여섯으로 줄었다 해도 솔직히 울음이 터져나올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국제학교의 영어수업 시간에는 목숨을 버릴 정도로 절절한 사랑(로미오와 줄리엣)이나, 질투에 눈이 멀어 아내를 죽인 남편(오셀로), 왕위를 찬탈했다가 몰락하는 폭군(맥베스)의 이야기가 수시로 등장한다. 때론 인종차별에 의연하게 저항하는 애티커스 변호사(앵무새 죽이기), 처절한 가난과 싸운 조드 가문 사람들(분노의 포도), 고뇌하고 방황하는 청년 홀든 콜필드(호밀밭의 파수꾼)가 등장해서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질문한다. “만약에 네가 나의 상황이면 너는 어떻게 할거야?” 학생들을 극한으로 밀어붙여서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게 하는 것이다.
이제 학생들은 어려운 질문에 답해야만 한다. 살인을 살인으로 복수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지(햄릿), 에스페로를 향한 칼리반의 섬뜩한 분노가 과연 비난 받을만한 것인지(템페스트), 샤일록은 과연 정당한 재판을 받은 것인지(베니스의 상인), 소라 고둥은 야만의 사회에서 결국 무력한 것은 아닌지(파리대왕), 데이지의 우유부단한 사고와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위대한 갯츠비), 등등.... 이쯤되면 줄거리랑 작가 이름 외우고 사지선다형 문제만 달달 풀던 한국학생들은 패닉에 빠지는게 당연하다.
학년이 올라가면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이번 연도에 첫째 딸 호비는 맥베스를 배웠는데, 영화로 재해석한 맥베스를 보던 즐거운 시간도 잠시, 맥베스를 현대의 컨텍스트에 맞게 재해석한 7분짜리 연설문을 작성해서 동료 학생앞에서 발표하는 시험을 보게 되었다. 전제 군주제가 어떤 폐해를 가지고 있는지, 현대 시대에도 유사한 독재자는 없었는지, 지금 미얀마에서는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건지, 이러한 독재체제를 예방하거나 무너뜨리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고등학생인 아이들이 이런걸 혼자서 다 조사해서 영어로 연설문을 조!리!있!게! 써야 한다는 거다.
고생하는 호비가 안쓰러워 이러저러한 아이디어로 아이를 조금씩 도와줬다. 결국 며칠 동안 낑낑대며 고생하던 첫째 녀석은 삼권 분립과 언론의 자유 그리고 시민사회의 적극적 참여가 중요하다는 (어찌 보면 뻔하지만) 그러나 나름 스스로 고심해서 도출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연설문을 쓰고, 다듬고, 다시 지우고, 고쳐쓰기를 지금 계속하고 있다. 아, 그리고 실제 연설할때 막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자기가 쓴 7분짜리 연설문을 통째로 외워야 하는 것은 마지막 화룡점정~~~
이쯤되면 이건 영어 수업이 아니다. 거의 정치철학 수업이다. 민주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이 무엇을 지켜야하는지를 묻고 답하는 철학 담론의 수준이 된다.
내 학창 시절을 돌이켜보니 우리 세대가 했던 것은 그저 열심히 암기하는 것이었다. '나랏말쌈이 듕귁에 달아..',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더니...' 그 당시 국어 선생님들에게 어찌나 지청구를 받으며 달달 외웠던지 지금도 기억나는 그 많은 구절들.. 하지만, 우리는 정작 그 수업에서 무엇을 질문하고 무엇을 답했었나? 무엇을 고민하고 무엇을 토론했었나?
이 글을 쓰는 내내 '내가 너무 서양숭배나 사대주의 사상에 빠진 건 아닌가? 우리의 국어 시간에도 무엇인가 인생과 사회에 대해 배운게 있지 않았을까?' 한참을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결론은 달라지지 않았다. 다른 수업은 몰라도 우리 중고등학교의 문학 시간에서는 수많은 '기능적 지식'을 묻고 답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질문을 묻고 답하지 않았다.
바로 그 지점에서, 스스로 비판적으로 사고할 기회를 가져본 적이 없는 우리 한국 학생들은 국제학교 영어 수업시간에 커다란 벽을 마주하는 것이다. 그 벽에 쓰인 질문은 때로는 셰익스피어의 우렁찬 목소리로, 때로는 J. D. 샐린저의 낮은 목소리로, 때로는 캐롤 앤 더피의 서늘한 목소리로 학생들에게 이렇게 묻고 있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너만의 독창적인 생각을 말과 글로 표현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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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출처 : 글쓴이기 직접 찍었습니다.
* "국제학교에 적응하는 꿀팁 (3) : 역사" 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