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와 이름을 안 외우면, 그럼 뭘 해요?...
* '국제학교에 적응하는 꿀팁 (2) : 영어(하)' 편에서 이어집니다. 혹시라도 '국제학교에 적응하는 꿀팁 (1)과 (2)를 이미 읽으신 독자분들 중에 바쁘신 분들, 또는 역사 과목을 정말 정말 싫어하신 분들을 위해 이번 편의 내용을 딱 두줄로 요약해드립니다.
"국제학교 역사 수업은 연도와 사람 이름 안 외웁니다. 그냥 제2의 영어입니다... 주구장창 읽고 에세이 씁니다.'... 끝 ...
자, 이제 다른 브런치 작가분들의 글 읽으러 가셔도 좋습니다..^_^...
하지만... 국제학교에서 역사를 어떻게 가르치는지 쪼끔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시면 이번 편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역사 과목이 싫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역사 수업은 견딜만했는데, 역사 시험은 정말 싫었다. 그리고 내 두 딸 호비와 호지도 지금 재학중인 국제학교에서의 역사 수업을 지독히도 싫어한다. 하지만 그 이유는 굉장히 다르다. 이제부터 우리 부녀의 역사수업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내 기억 속 역사 수업은 오로지 각종 사건의 이름 (다음의 사건들을 시간 순서대로 올바르게 나열한 것은? (1) 갑신정변, (2) 갑오개혁, (3) 임오군란, (4) 아관파천)과 수많은 책의 제목 (다음의 책들을 시간 순서대로 올바르게 나열한 것은? (1) 징비록, (2) 성호사설, (3) 자산어보, (4) 격몽요결), 그리고 지명 (다음의 비석들을 시간 순서대로 올바르게 나열한 것은? (1) 중원고구려비, (2) 광개토대왕비, (3) 진흥왕 순수비, (4) 단양 적성비)을 외우는 수업이었다.
아... 가끔 종교 문제도 있었고 (다음 중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파된 순서를 올바르게 나열한 것은? (1) 고구려-백제-신라 (2) 백제-고구려-신라 (3) 신라-백제-고구려 (4) 백제-신라-고구려), 실생활과 관련된 문제 (다음 중 우리나라에 전파된 순서를 올바르게 나열한 것은? (1) 목화 (2) 감자 (3) 고구마 (4) 고추)도 있긴 했었다.
그러다가 학년말에 도달하면 드디어 학생들을 가장 괴롭히는 난이도 최강의 독립운동사가 기다리고 있다. 이름도 비슷비슷한 각종 단체와 독립운동의 이름과 연도를 외우다 보면 정말 머리가 터질 지경이 된다. (다음 단체들을 설립 순서대로 올바르게 나열한 것은? (1) 신간회, (2) 신민회, (3) 의열단, (4) 한인애국단)... 외우고 잊어먹고, 또 외우고 또 잊어먹고.. 아.. 우리 조상님들은 왜 이리도 많은 책을 쓰시고 왜 이렇게 많은 비석을 세우셨단 말인가? 원망스러웠다.
처음에는 암기를 싫어하는 나의 피를 물려받아 호비와 호지가 역사 수업을 싫어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이들의 역사 수업 내용을 자세히 들어보니 내가 배웠던 역사 수업과는 완전히 달랐다. 내가 역사 수업을 싫어했던 이유와 아이들이 역사 수업을 싫어하는 이유가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첫째로, '얇고 넓게'와 '좁고 깊게'의 차이가 있다. 우리의 역사교육은 '얇고 넓게' 우리나라의 역사 전 과정을 꼼꼼하게 다룬다. 그리고는 열심히 암기한다. 그 덕분에 우리는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가 어디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그곳에서 신석기 유물이 발굴되었다는 사실만은 안다. 역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저서들을 단 한 권도 (한문으로 된 원본은 물론이고 한글 번역본도) 읽어보지 않았지만 우리는 책 제목만큼은 완벽하게 외운다.
그런데, 호비와 호지의 수업을 살펴보니 '좁고 깊게' 배우고 가르치고 있었다. 서로마 제국을 몇 주 동안 공부하더니 갑자기 중세시대와 동로마 제국으로 넘어가 그 시대를 몇 주 동안 공부하고 있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한참 동안 다루는가 싶더니 어느새 근대 역사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제가 되는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변화상을 매우 심도있게 가르쳤다. 한마디로 세계사에서 중요한 '변곡점'만을 골라 그 시대를 통합적으로 배우고 가르쳤다. 나머지 시대들은 정말로 과감하게 건너뛰었다.
실제로, 우리가 프랑스에 있을 때 호비가 초등학교 6학년 역사시간에 '로마제국이 어떠한 방식으로 영국을 침략하고 식민지화했는지'를 배우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다. 일단, 초등학교 6학년에게 그렇게까지 심화된 내용을 가르친다는 사실에 놀랐고, 로마 제국이 영국을 침략한 배경, 침략할 때 사용한 군사전략, 도로 등 사회 인프라 건설 목적과 그 양상, 당시의 종교 및 생활상을 매우 통합적으로 가르치는 수업 내용에 상당히 놀랐던 기억이 있다.
한국의 역사교육은 역사 전체를 빈틈없이 싸맨 얇고 넓은 보자기와 같다면, 서양식 역사교육은 몇몇 부분은 두툼하고 튼실하지만, 나머지 부분은 구멍이 휑하게 뚫린 치즈와 같다고나 할까? 한국인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호비와 호지의 역사 실력은 그야말로 형편없는 수준이 되어버렸다. 자기들이 배웠거나 관심 있는 시대에 대해서는 몇 마디 할 줄 아는 듯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어느 시대가 어느 시대보다 앞서는지와 같은 '얇고 넓은' 지식은 완전히 꽝이 되어버린 것이다.
* 사진출처 : 글쓴이가 직접 찍었습니다.
* '국제학교에 적응하는 꿀팁 (3) : 역사(하)' 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