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딱하게 바라보는 법'을 가르치는 국제학교의 역사수업...
* '국제학교에 적응하는 꿀팁 (3) : 역사(상)' 편에서 이어집니다.
둘째로, 배우고 가르치는 방식이 많이 다르다. 다른 과목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한국의 역사교육은 초중고 과정 모두 선생님들이 쭈욱 판서하고 아이들은 받아 적는 일방적 지식 전달의 방식으로 이뤄진다. 아이들이 초중등 과정을 다닌 프랑스 학교에서도 선생님들은 주로 지식을 전달하고 아이들은 그것을 배우는 모양새는 비슷하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 이곳 인도에 있는 미국계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보니 역사 수업의 대부분이 특정 주제에 대한 자율적인 조사와 에세이 작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심지어 첫째 딸 호비는 역사 수업시간에 다른 사람이 쓴 문헌을 어떻게 비판적으로 읽고 또 인용하는지 그 방법론을 몇 주 동안 배우기도 했다. 나는 그런 수업을 대학교 학부때에도 받아본 적이 없다.)
즉, 초중등 과정에서는 아이들이 역사에 흥미를 가질 수 있는 지식(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중세시대 기사들의 삶이나 제1차 대전 전쟁사는 초중등 역사 시간에 꼭 가르친다. ^_^:)을 집중적으로 전달한 후, 고등학교에 들어온 아이들에게는 '르네상스와 산업혁명을 가능케 한 도시화의 과정' 또는 '동서양의 여러 제국(empire)을 성립하게 만든 조건들'과 같이 제법 수준 있는 내용을 토론하고 에세이를 쓰게 시키는 모양새였다. 오죽하면 둘째 딸 호지는 엄청난 자료조사와 에세이 작성에 질려서 '역사는 그냥 제2의 영어과목이야. 엄청 읽고 조사하고 에세이 쓰는 거야.'라고 정의를 내려버렸다. :(
두 번째 차이점과 밀접하게 연결된 세 번째 차이점은 바로 역사 교육의 목적이었다. 우리나라의 역사교육은 역사적 지식을 많이 전달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다. 많은 수의 사람, 책, 비석, 각종 제도의 이름과 연도를 외우게 하는 것... 책 내용은 몰라도 책 제목은 꼭 알아야 하는 게 한국의 역사 수업이라고 말한다면 너무 냉소적인 진단일까?
반면, 국제학교의 역사교육, 특히 고등학교 이상에서의 역사교육은 학생들이 스스로의 역사 인식을 정립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많은 미국 학생들이 시험 보는 AP US History 과목에서도 사지선다형과 단답형 문제는 출제된다. 콜럼버스의 미 대륙 발견 시점인 1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서 문제가 출제되니 출제 범위도 제법 넓다. 하지만, 배점의 약 40%는 역사적 문서를 읽고 이를 기반으로 에세이를 쓰거나 아니면 아예 긴 에세이를 쓰는 문제로 구성되어 있다. 학생들이 갖고 있는 역사 지식이 아닌 역사 인식을 묻는 것이다.
프랑스 대입(바깔로레아) 역사시험은 미국 역사 시험과는 또 다르다. 일단, 프랑스 역사 시험의 불문율은 19세기 이전의 사건은 출제 범위에 아예 들어가지도 않는다는 거다. 역사 시험인데 불과 몇십 년 전 사건만을 묻고 답한다. '과거를 묻지 않는' 역사 시험인 것이다. 그러니 프랑스 학생들은 그 길고 어려운 프랑스 왕 이름 하나도 외울 필요도 없고 책 이름, 비석 이름도 당연히 외울 필요가 없다. 대신 2개의 긴 에세이 문제중 하나를 선택해 답하는데, 그 주제가 한국의 역사 선생님들이 들으면 눈이 동그래질만한 주제들이다.
실제로, 2018년 프랑스 대입(바깔로레아) 역사시험은 '역사 연구의 발전과 프랑스 사회의 기억'이라는 주제로 문제가 출제되었다. 2차 대전중 발생한 유태인 학살과 1960년대에 프랑스의 잔인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끝내 성공한 알제리 독립전쟁과 관련된 문서들을 각각 제시한 후 '역사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유태인 학살 또는 알제리 독립전쟁에 대한 프랑스 사회의 인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설명하라'는 문제였다. (참고로, 이렇게 과거의 잘못을 성찰하는 문제는 프랑스 바깔로레아에 단골 문제들이다. 예를 들어, '2차 대전 이후 중동이 왜 화약고가 되었는지 설명하라'라는 문제도 출제된 바 있다. 지금의 중동이 왜 지금의 중동이 되었는가? 영국, 프랑스와 같은 서구 열강의 식민지배 후유증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우리 같은 외국인들은 잘 모르지만, 2차 대전 때 프랑스 거주 유태인들을 색출하고 학살하는데 프랑스인들은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자유, 평등, 박애를 떠들어대는 프랑스가 불과 육십년 전에 알제리의 독립운동을 얼마나 잔인하게 유혈 진압했는지는 글로 옮기기 고통스러울 정도이다. 그들은 이러한 부끄러운 역사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미국 역사 시험은 객관식 문항에서 역사 지식을 묻는 문제가 일부라도 있었지만 프랑스에서는 그런 것조차 없다. 그냥 대놓고 역사 인식만 묻는다.
우리로 치자면, '일제시대 친일파들이 어떻게 일본 제국주의에 협조하였는지를 서술하고 본인의 의견을 쓰시오', '베트남 전쟁에서 우리나라 군인들이 어떻게 베트남 시민들을 학살했는지를 서술하고 본인의 의견을 쓰시오' 정도의 문제라고나 할까. 아직도 사회 곳곳에 힘깨나 쓰시는 친일파 후손들이나 베트남 참전전우회 회원들에게 엄청난 항의를 받을 각오를 하지 않고는 출제할 수 없는 문제들일 것이다.
나와 호비, 호지 모두가 공통적으로 싫어하는 역사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글이 많이 길어졌다. 이제 결론을 내리자면 국제학교의 역사수업은 가르치는 수준이 좁고 깊다. 그리고, 역사 수업을 다 듣고 졸업장을 받고 학교 문을 나서는 학생들이 단순히 역사 지식뿐만 아니라 역사 인식을 가지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과거의 사건을 배우고 이를 바탕으로 현재의 정치, 경제 상황을 ‘삐딱하게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수업인 것이다.
지금 호비는 Ku Klux Klan이 한 때 쇠퇴했다가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다시 세력을 회복한 이유를 조사한 에세이를 쓰고 있다. 호지는 실크로드를 여행하는 가상의 여행자가 되어 여행일기를 쓰라는 숙제를 하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어차피 한국 대학을 가고 한국 가서 살 아이들인데 KKK를 이렇게 연구해서 어디에 써먹을까 의문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수업이 끝나면 인종차별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역사인식이 조금이나마 호비에게 생기려나?
KKK와 같이 어두운 현대 역사를 가감 없이 가르치는 외국의 역사 교육... 이에 비해 꿋꿋하게 수백년 전의 역사 지식만을 전달하고 있는 우리의 역사교육... 과연 우리 사회는 역사 수업을 통해서 학생들이 무엇을 얻길 원하는 걸까? 다시 한번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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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출처 : 글쓴이가 직접 찍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