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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비와 호지의 아빠 Dec 06. 2021

나한테 산소 호흡기 꽂지 마라..

아버지랑 나랑 그렇게 결정했으니 너는 그리 알아라

며칠 전 한국에 계신 어머니께 안부전화를 드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어머니께서 건강보험공단을 방문하여 연명치료 거부 등록하고 오셨다는 말씀을 툭 꺼내셨다.


"아버지랑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산소 호흡기는 꽂지 마라... 그냥 깨끗하게 떠날 테니까."


쿨하고 의연한 것으로 따지자면 우리 식구 중에서 항상 1등을 달리시는 ‘강여사님’(필자의 어머니) 다운 선언이셨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리고 어떻게 닥쳐올지 모르지만 그 슬프고도 막막한 이별의 시간이 닥치더라도 굳이 산소호흡기, 링거 주사, 각종 검사장치 같은 것들 주렁주렁 매달고 목숨 부지하지 않겠다는 거다. 아들, 며느리, 딸, 사위, 손녀, 외손녀들 다 남겨놓고 훌훌 털고 떠나가실 테니 자기 갈길 막지 말라는 거다...


이건 뭐 의논하자는 게 아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의견을 묻는 것도 아니다. 그저 “아버지랑 나랑 그렇게 결정했으니 너는 그리 알고 있어라. 토 달지 말고”라는 일방적인 통보이다. 말 그대로 '갑자기 훅 들어온' 어머니의 선언에 '잘하셨어요'라고 말할 수도 없고, '저하고 상의도 없이 왜 그러셨어요?'라고 답하기도 애매해서 그냥 '알겠습니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좀 더 듣고 있자니 나에게 이 말을 꺼내신 이유가 금방 이해되었다. 연명 치료 거부 등록을 하셨다는 어머니의 말씀은 잘 준비된 밑밥(^_^;)이었다. 떠날 때 깔끔하게 떠나더라도 살아있는 동안은 좀 품위 있게 살아야겠으니 보청기 비용을 좀 보내라는 말씀이셨다. (ㅎㅎ) 살아나지도 못할 산송장이 되고나서 이것저것 꽂고 찌르고 째면서 돈 낭비하지 말고, 당신 본인이 살아 있는 동안 품격 있게 살 수 있도록 해달라는 말씀이셨다.


역시나 우리 강여사님 다운 협상방법이었다. 기브 앤 테이크... 줄 건 확실히 주고, 받을 건 확실히 받는 깔끔하고 효과적인 원투펀치...(^_^;)...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돈은 곧 송금해드리겠다고 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나니 자식과 손녀들과의 이별을 하나씩 둘씩 차근차근 준비하고 계신 부모님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면서 마음 한 구석이 쓸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다음 날 아침.


아내와 식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연명치료 거부 이야기를 꺼냈다. 아내도 알아야 할거 같아서 슬쩍 입을 뗐는데, 오히려 아내가 눈을 똥그랗게 뜨더니 한마디 한다.


"우리야 말로 그거 등록해야겠다. 호비와 호지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도 등록해야 하지 않을까?"

"호비 엄마 생각에도 그래야겠지? 언젠가 한국 들어갈 때 그때 등록하자."


얼떨결에 우리 부부도 연명치료 거부 등록을 하기로 마음이 모아졌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혼자 조용히 생각해보니 참으로 막막하고 슬픈 상상을 안할래야 안 할 수가 없다. 그래서는 정말로 안 되겠지만, 혹시라도 무슨 일이 부모님께 생긴다면, 중환자실 복도 앞에서 어떤 대화가 어떤 분위기 속에서 오고 갈지 너무나도 뻔히 상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가망이 없으십니다"라는 의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착하고 겁많은 여동생, 법 없이도 살 것 같은 순둥이 사위, 그리고 내 아내까지 이렇게 3명이 모두 내 얼굴만 빤히 바라보게 될 것이다. "산소호흡기를 삽관하지 마세요. 고인의 뜻입니다."라는 말이 하나뿐인 아들인 내 입에서 떨어지기 전까지 그 누구도 그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할 것이다. 그 마지막 말을 해야 할 무거운 책임은 내 어깨 위에 온전히 얹혀질 것이다. 어머니는 장기기증서약도 이미 오래전에 해놓으셨으니, 뒤이어 무슨 일이 우리 가족을 기다리고 있을지 굳이 설명하지 않으련다.


막상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런 말을 내가 내 입으로 내뱉는다면... 그러고 나서도 나는 '부모님을 내 손으로 죽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을까? 손으로 만져보면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부모님의 손과 얼굴, 산소호흡기만 삽관하면 다시 살아나실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힘차게 뛰고 있는 심장... 그 모든 것을 눈앞에 두고도 과연 내가 그런 매정한 말을 내뱉을 수 있을까? 설령 내뱉는다고 해도 내가 평생을 지고 가야 할 무서운 죄책감은 또 어쩔 것인가?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미리 앞당겨서 걱정하는 것도 늙어간다는 증거 중에 하나라더니, 내가 지금 딱 그 꼴이다. 어머니와의 전화통화 이후 며칠 동안 마음만 심란할 뿐이다. 그렇다고 어머니의 뜻을 꺾을 요량도 재주도 없다. 한번 결정하시면 하늘이 두쪽 나도 바꾸시지 않는 강여사님 성미를 잘 알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멀쩡히 건강하신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날을 쓰잘데기 없이 상상하는 이런 불효 막심한 놈이라니... 이러다가 내가 천벌 받지... 에휴.. 이러다가 내가 벼락 맞지.. 마음이 심란하구나, 심란해..


///


* 연명치료는 치료의 효과가 없는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착용’, ‘항암제 투여’를 말한다. 연명치료 거부 등록은 가까운 건강보험공단 또는 보건소 등에서 할 수 있다. 보호자(통상 배우자)가 동행하여 연명치료 거부 의사에 동의해야 한다. 21년 8월말 기준 신청자가 100만명을 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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