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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비와 호지의 아빠 Sep 18. 2021

자네 외조부가 빨갱이한테 부역만 안 했어도...(2)

그렇게 세월은 무심히 흘러가고…

* 자네 외조부가 빨갱이한테 부역만 안 했어도...(1)(https://brunch.co.kr/@hobiehojiedaddy/5)에서 이어집니다.




천석꾼 집안에서 삼대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똑똑한 아들이라고 온갖 칭찬을 다 들으며 금이야 옥이야 자라온 청년이 하나 있었다. 그는 멀쩡했던 자기 나라가 하루아침에 다른 나라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을 자기 두 눈으로 목격했다. 피가 끓듯이 뜨거웠던 이 청년은 식민지 시대라는 부조리에 맞서기 위해 적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동경으로 유학을 감행한다. 어차피 재산이야 부족함 없고, 공부도 자신 있었으니, 그 당시로서는 세계의 중심이라 할만한 도시에서 지식과 힘을 축적하며 조국을 되찾는 일에 힘을 보태면 되리라는 지극히 순진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식민지의 깡촌에서 유학 온 청년에게 동경에서의 유학생활은 호락호락했을까? 자기가 품고 갔던 그 희망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국에 두고 간 젊은 아내(필자의 외할머니)는 그저 남편이 무사히 공부 마치고 건강히 돌아오기를 기약 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을 테고, 그런 그녀에게 신앙이라는 가느다란 끈은 마지막 희망이었을 것이다. 덕분에 필자의 외할머니는 충청남도를 통틀어 거의 1세대 기독교인이 되셨다(^_^;).


머나먼 타지에서 식민지 시대의 부조리라는 단단한 벽에 부딪친 청년... 미쳐버리지 않으려면 무언가 탈출구가 필요했다. 공부도 다 때려치고 그가 정신나간 사람처럼 열심히 탐닉했던 바이올린 연주와 사진 촬영 취미는 그 젊은이가 숨 쉴 수 있는 마지막 공간이 아니었을까?




세월은 무심히 흘러갔고, 모든 사람을 잘 살게 해 주겠다는 새로운 사상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38선을 밀고 내려왔을 때, 이제는 청년을 지나 장년의 시기에 들어선 그에게는 그리 많은 선택지가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조상이 물려주신 재산을 남기고 피난길을 떠날 수도 없는 노릇. 결국 자기 집에 딸린 식솔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부역의 길로 들어섰다. 인민군의 입장에서도, 순순히 곳간을 열어 자신들을 대접하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산당 활동을 지지하는 '협조적인 브르주와'를 굳이 죽일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몇 시간씩 열리곤 했던 인민위원회 회의에 참석하고 집으로 돌아온 외할아버지는 기억에 의존해 급하게 몇몇 사람들의 이름을 큰 아들(필자의 외삼촌)에게 불러주곤 했다. 젊고 날쌘 큰 아들은 인민군의 눈을 피해 달빛도 없는 산길을 밤새도록 내달려서, '내일 우리 아버지가 인민군이랑 같이 당신 가족을 잡으러 올 테니 오늘 밤에 빨리 떠나라'라는 전갈을 그 사람들에게 전해주곤 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합심한 이 위험천만하고도 아름다웠던 협동작업은 국군이 그 동네를 수복할 때까지 비밀리에 계속되었다.  


국군이 다시 동네를 수복했지만 외할아버지의 수난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국군의 눈에는 수많은 동네 사람들 목숨을 살린것과 공산당에게 협조한 것은 엄연히 별개의 일이었을테니까 말이다. 결국,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고초라는 고초는 모두 다 겪으셨고, 외할아버지는 전쟁이 끝나기 전에 세상을 떠나셨다. 사방 수십 리에 걸쳐있던 외할아버지 논밭도 손가락 사이에서 모래가 빠져나가듯 다 사라져 갔다. 비극은 본인으로 끝나지 않았다. 자식은 물론, 그 자식의 자식까지 변변한 직장에 단 한 명도 취업하지 못하는 연좌제의 무서운 족쇄를 벗어날 수도 없었다. 한 집안이 서서히 그리고 완벽하게 파괴되고 있었다.




어릴 적 큰외삼촌 또는 작은 외삼촌 댁에 놀러 가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조선왕조의 역사도 모자라 웬만한 유럽 나라 왕실의 역사를 술술 외워서 들려주시던 외삼촌... 어찌나 재미있게 말씀도 잘하시는지... 나에게는 두 분이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름만 들어도 ‘허걱’ 소리가 절로 나오는 명문대를 졸업하신, 그렇게도 명석한 분들이 왜 변변한 사회생활 한번 못하고 시골에서 그렇게 세월을 보내시는지 그때는 잘 몰랐었다.


더욱더 안타까웠던 것은 이모님 세분의 사연이었다. 부역자의 딸로 낙인찍혔으니 어디 제대로 된 변변한 혼처나 찾을 수 있었겠는가? 빼먹지 않고 월급이 나오는 시골 공무원 집안에 시집온 필자의 어머니는 그나마 나은 축이었다. 이모님들이 겨우겨우 남편감은 찾아 결혼은 했지만, 하루 벌어서 하루 살아야 하는 힘든 나날이 수십 년 계속되었다. 그중 한 분은 남편에게 지속적인 학대를 받고 스스로 자기 생을 마감하는 끔찍한 일도 있었다. 부역자의 딸이라는 낙인만 없었더라도 그렇게까지 잔인한 학대를 받지는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잔인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끝까지 품위를 잃지 않고 가족을 지켜내신 분은 외할머니셨다. 하나밖에 없는 남편이 공부한답시고 몇 년간 집을 훌쩍 떠났다가 돌아온 것도 모자라, 허깨비 같은 이데올로기에 홀려서 당장 내일이라도 유토피아가 올 것처럼 공산당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을 때 외할머니는 도대체 어떤 심정이셨을까?


남편을 기다리며, 그 이후에는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 매일 밤 기도를 멈추지 않았던 외할머니는 몇 년 전 107세로 세상을 뜨시기 전까지 단 하루도 성경책 읽기와 기도를 멈추지 않으셨다. 그 흔한 감기 치레 없이 건강하고 정신이 맑으셨던 외할머니는 마치 석양이 갑자기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듯, 화려했던 군자란(君子蘭)의 꽃이 갑자기 떨어지듯 세상을 떠나셨다. 나를 포함해 외할머니 덕분에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던 모든 후손들은 마치 가슴에 큰 구멍이 뚫린 듯했다.




식민 시대에서 시작하여 동족상잔의 비극을 거쳐면서 지속된 이념적 갈등의 시대가 100년을 훌쩍 넘기다 보니, 수천만명의 우리 민족 중에서 우리 가족과 유사한 고통을 겪은 가정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때로는 울부짖으면서 때로는 속으로 울음을 삼키면서 식민지 시대의 밤을, 전쟁의 밤을, 그리고 독재의 밤을 지새운 사람들이 어찌 우리 가족뿐이겠는가?


필자의 외가가 격동의 세월을 견뎌온 반면, 필자의 본가는 '승리자' 편에서 비교적 평온한 삶을 영위해왔다. 일제강점기 공무원으로 적극적이었던 소극적이었던 부역을 했던 가장(필자의 친할아버지) 가세가 급격히 기울면서 똘똘한 첫째 아들(필자의 아버지)대학에 보내지 못하고 말았다. 하지만, 똑똑하고  깊었던 첫째 아들은 부모에게 원망 한마디 내뱉지 않고 대학의 꿈을 접었다. 그리고는, 경찰공무원 시험에 합격했고,  무서웠던 독재의 시대에 푸른 제복을 입고 가족들을 먹여 살리셨다. 그리고, 그는 세상에 많고 많은 여자중에 부역자의 (필자의 어머니) 맞선을 보고 결혼했다. 너무나도 잔인한 아이러니였다.


역사는 그런 우리 가족에게 잔인했지만, 시간은 우리 가족에게 자애로웠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작 하루하루 벌어먹고 사는 신산한 시간 속에서 이념이고 역사고 점점 옅어지고 희미해졌다. 결국 유물론자와 유신론자, 공산주의자와 기독교인, 친일 부역자와 독재시대의 경찰관... 이 모든 모순적이다 못해 미치광이같은 비현실적인 조합이 오늘의 나라는 존재를 가능하게 했다. 이념과 생계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던 수십 년의 힘겨운 세월은 그렇게 지나갔고 이제는 우리세대마저 기성세대가 되었다. 세월이 그만큼이나 많이 흐른 것이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호비와 호지의 세대가 주인공이 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며칠 전 어머니와 통화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어머니가 한마디 꺼내셨다.


'기억이 더 희미해지기 전에 네 외할아버지 때부터 있었던 이야기 한 번 써보려고 한다'

'네. 한번 써보세요... 근데, 엄마... 쓰시면서 너무 가슴 아프시지 않겠어요?'


내 질문에 전화기 너머 어머니는 한참이나 말이 없으셨다. 어머니가 그동안 얼마나 힘드셨을지 다 알고 있는 나 역시 뭐라 더 드릴 말씀이 없었다. 그렇게 우리 둘은 오랜동안 말없이 수화기를 들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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