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출생의 비밀(?)은 그렇게 밝혀졌다.
1990년 여름.
하루에 대여섯 대 밖에 없는 시내버스는 뙤약볕이 내리쬐는 허름한 시골 정류장에 나만 덩그러니 내려놓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정류장에서 외할머니댁까지는 걸어서 꼬박 20분. 아직 점심때도 되지 않았는데 이미 온 세상을 뒤덮은 텁텁하고 무더운 공기에 정류장 옆 논에 심긴 볏단마저 추욱 처져 있었다. 바람 쐬고 재충전하기도 전에 일사병으로 쓰러지게 생긴 형국이었다.
몇 달 동안 계속된 재수 생활에 지쳐 바람도 쐴 겸 외할머니댁이라도 잠깐 다녀와야겠다고 마음먹은 게 후회되기 시작했다. 시내로 다시 되돌아가는 버스는 몇 시간 후에나 있다. 퇴로가 막힌 셈이다. 꾸역꾸역 걸어서 외할머니 댁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몇 걸음이나 옮겼을까. 하얀색 코란도 차량이 내 옆에 멈춰 섰다.
"어이, 학생. 저기 잣디 사는 OO 씨(필자의 큰외삼촌) 조카 아닌가? 맞지?
더운데 어여 타. 내가 태워다 줄게."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낯선 아저씨였지만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외할머니댁은 전체 주민이 채 100명도 안 되는 촌동네 중에서도 촌동네... 이웃집 부엌에 있는 숟가락 젓가락 숫자는 물론이고, 옆집 강아지가 방귀만 끼어도 온 동네에 '어이구, 덕선이네 강아지가 방귀 뀌었슈'라는 소문이 반나절만에 퍼지는 그런 동네였으니 말이다. 워낙에 어릴 적부터 뻔질나게 외할머니댁을 드나들던 나를 오래전부터 알고 계셨던 동네 아저씨임에 틀림이 없었다.
나는 그 아저씨 이름도 잘 모르고 얼굴도 가물가물한데, 그분은 우리 외가 소식을 나보다도 더 잘 알고 계셨다. 충청도 촌 아저씨답지 않게 꽤나 수다스러웠던 그분은 우리 외가의 족보까지도 쭈욱 훑으시더니 말 끝에 한마디를 슬그머니 흐렸다.
"에구. 그나저나 OO 씨(필자의 큰외삼촌) 부친께서 빨갱이들한테 부역만 안 하셨더라도..."
전쟁통에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만 어머니를 통해서 얼핏 들었던 바로 그분, 나의 외할아버지에 대해서 이 아저씨는 그렇게 툭 한마디를 내뱉었다. 나도 알지 못하던 우리 외할아버지의 엄청난 과거를 낯선 동네 사람에게서 처음 듣게 된 것이다. 똥그랗게 커진 내 눈과 그 아저씨의 눈이 마주쳤다. 그 수다스럽던 아저씨도 아차 싶었는지 입을 꾹 닫았고, 외할머니댁 앞에 나를 내려주고는 이내 차를 몰고 사라지셨다.
신작로에서 외할머니댁 대문까지 올라가는 그 짧은 발걸음 동안 머릿속이 하얗게 혼란스러워지는 느낌이었다. 연좌제라는 무시무시한 제도가 폐지된 지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은 1990년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빨갱이의 후손'이라는 말이 인생 최고의 모욕인 시대였다.
'우리 집안에 더러운 빨갱이의 피가 흐른다는 말인가?'
그날 외할머니댁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점심으로 뭘 먹었는지도 기억 안 난다. 하도 머릿속이 어지러워 하룻밤 자고 가라는 외숙모님의 말씀도 뿌리치고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미친놈처럼 뛰어나와 버스정류장을 향해 내달렸다.
내가 가끔 외할아버지가 어떤 분이셨는지를 물으면, 어머니의 설명은 '전쟁통에 돌아가셨어'로 끝이었다. 해방 전에 태어나신 어머니가 채 10살도 되기 전에 돌아가셨으니 기억이 많지 않으신 게 당연한가 보다 생각했고 나는 더 이상 의문을 품지 않았었다.
외할머니댁에 놀러 갈 때마다 그 깡촌에 어울리지 않는 외할아버지의 유품들 - 고가의 바이올린과 카메라, 이름만 대면 알만한 교회의 목사님들과 나누신 편지들, 그리고 멋들어진 중절모에 코트를 입으신 외할아버지의 흑백사진까지 -을 보곤 했었지만, 그러한 물건들이 그 시골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까지는 미처 못했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던 저녁 어스름.
외할머니댁에서 하룻밤 자고 올 줄 알았던 내가 대문을 열고 쓰윽 들어오자 어머니도 놀라셨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머니께 정말로 죄송스럽지만, 솔직히 고백하건대 어머니를 바라보며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빨갱이의 딸'이라는 생각이었다. 나를 낳아주시고 정성으로 길러주신 어머니를 보면서 그렇게 끔찍한 생각이 떠오를 정도로, 19년 동안 내가 끊임없이 받아온 반공교육의 효과는 무시무시했다.
더 이상 머뭇거릴 이유도 없었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어머니에게 물었다.
"엄마, 외할아버지가 부역하셨다고 들었어요. 무슨 이야기죠?"
어머니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금세 평정심을 찾으신 어머니가 차분하게 말씀하셨다.
"배고프지? 저녁부터 먹자”
어머니가 나를 앉혀놓고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과거 이야기를 털어놓으셨다거나 극구 자기 아버지(필자의 외할아버지)의 부역행위를 부정했으리라고 예상하셨다면, 당신은 티브이 드라마나 영화를 너무 많이 보셨다. 그런 극적인 장면은 없었다.
어머니가 채 10살도 되기 전에 돌아가신 자기 아버지에 대해서 기억이 남아 있어봤자 얼마나 남아 있겠는가? 얼굴 조차 기억 못 하는 아버지의 과거 행적은 어머니가 철이 든 이후에서야 자기보다 손윗 오라버니와 언니에게 듣고 나서 비로소 알게 되었으리라. 어머니는 그날 밤, 때로는 남의 이야기하듯, 때로는 무덤덤하게 지난 40여 년의 이야기를 나에게 털어놓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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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네 외조부가 빨갱이한테 부역만 안 했어도...(2) 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