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이런 것도 표절이라고요?

국제학교에서 한국 학생들이 아무 생각 없이 저지르는 어이없는 실수

잠시 고등학교 수학 수업시간으로 돌아가 보자. 수학선생님은 평균, 중간값, 표준편차 등등 기초적인 통계 개념을 가르치고 계신다. 데이터 세트를 학생들에게 나눠주고는 그 데이터 세트를 활용해서 어떻게 그런 값들을 계산하는지를 설명하는 자료도 나눠주셨다. 깔끔하게 정리된 선생님의 설명 자료를 꼼꼼히 읽어보니 개념도 쏙쏙 이해된다.


자, 이제 선생님이 새로운 데이터 세트를 나눠주시고는 그 새로운 자료를 이용해서 각종 기초 통계값을 찾아낸 후 이를 설명하는 짧은 에세이를 써오라고 숙제를 내셨다. 집으로 돌아와서 선생님의 설명자료를 다시 한번 꼼꼼히 읽고 계산기를 몇 번 두드리니 값들이 척척 계산된다. 선생님 설명자료에서 숫자만 바꿔 넣은 후 에세이를 써서 제출했다. 국제학교로 전학 온 이후로 계속 기죽어 지내는 이 학생에게 수학 시간은 그야말로 거의 유일하게 기를 펼 수 있는 시간... 수월하게 숙제를 마친 이 고등학생은 기분이 뿌듯해졌다.


하지만, 바로 다음날 선생님은 이 학생을 불러 엄하게 꾸짖고 경고했다. 이 학생의 행동은 교장선생님에게도 보고가 되었고, 학부모에게도 공식적으로 서면 경고가 보내졌다.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것이다. 이유는... 바로 그 수학 숙제 때문이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여기까지 읽고 '어이쿠, 큰 일났네'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면 당신은 국제학교에 자녀를 보내고 있는 학부모이고, '선생님이 배포해주신 자료를 보고 잘 따라서 했는데 뭐가 문제지?'라고 생각한다면 전형적인 '한국 학부모'이다. 이 학생의 행동을 자세히 살펴보자.


이 학생은 선생님이 주신 설명자료에서 숫자만 바꾼 후 선생님의 설명자료에 있는 문장을 그대로 자신의 에세이에 옮겨 적었다. 예를 들어, "이 자료의 모집단은 XXX명인데, 그 평균값은 YYY이며, 중간값은 ZZZ이다.."에서 XXX, YYY, ZZZ만 싹 바꾼 후 그대로 자신의 에세이에 옮겨 적은 것이다. 한국 학교라면 선생님의 모범적인 답안을 그대로 따라 적은 학생이 100점 또는 A+를 받겠지만 국제학교에서는 이러한 행위는 명백한 표!절!행위이다.


"아니. 선생님이 주신 모범답안을 그대로 옮겨 적었는데 칭찬은 못해줄 망정 학생에게 경고를 주다뇨? 게다가 그게 아무리 표절에 해당하는 행위라 하더라도, 그런 사소한 일을 가지고 학생을 불러다가 혼내고 교장선생님한테도 통보하고 학부모에게도 경고한다고요? 설마 국제학교에서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나요?"


정답은 그!렇!다! 이다..




며칠 전...


아침 일찍 아내의 핸드폰이 요란스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출근을 서두르며 들어보니 말레이시아서 살고 있는 처제의 목소리이다. 핸드폰 밖으로 흘러나오는 처제의 목소리에는 근심이 가득 차 있었다. 바로 처제의 첫째 딸(우리 부부에게는 조카)이 위에서 설명한 일을 저질러서 수학선생님에게 경고를 받고, 교장선생님에게도 통보되고, 학부모(처제)에게도 제법 긴 장문의 경고 편지가 날아온 것이다.


수업이 끝나고 조카를 불러 세운 선생님은 표절행위는 자칫하면 퇴학까지도 불러올 수 있는 심각한 행위라는 사실을 힘주어 강조했다고 한다. 마음 여리고 영어에도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불쌍한 9학년짜리 조카는 겁에 잔뜩 질린 채 집으로 돌아왔단다. 한 가지 웃픈 일은 선생님께 경고받은 학생이 조카만은 아니었는데, 나머지 학생들 모두 다 약속이나 한 듯이 한국 학생들이었다는 것이다. 조카뿐만 아니라 다른 한국 학생들도 똑같은 방식으로 숙제를 했다가 줄줄이 경고를 받은 것이다. 다른 나라 학생들은 모두 다 자기 나름대로 새롭게 에세이를 썼지만 한국 학생들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선생님이 나눠준 '모범답안'을 베껴 썼다가 졸지에 표절이나 하는 부정직한 학생으로 몰린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각 나라의 교육적, 문화적 환경이 다르다는 것이 제일 큰 이유일 것이다. 지식을 외우고 암기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리나라의 교육환경에서는 일단 제대로 된 글쓰기 교육 자체를 할 일이 없다. 수능에서의 '킬러 문항'을 맞추는 게 중요하지 글쓰기 따위가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글쓰기 교육 자체를 안 하는데, 표절이 무엇인지, 남의 글은 어떻게 인용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지는 더욱더 가르칠 일이 없다.


게다가 우리나라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무비판적으로 암기하는 것만이 살길이다. 선생님이 나눠주신 프린트물에 적혀있는 각종 설명자료를 그대로 암기해야 한다. 심지어 대학교에서도 교수님이 적어준 내용을 그대로 외워서 쓰면 A, 그렇지 않으면 B나 C를 맞는 상황인데, 고등학교나 중학교에서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각종 취업시험과 고시들은 또 어떤가? '정답'을 달달 외우고 있다가 그걸 그대로 옮겨 적어야만 합격하고 그렇지 못하면 그야말로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좀 심하게 말하면 우리나라는 표절을 해야만 살아남는 사회인 것이다.


그런데, 영미 문화권에서는 남이 쓴 글을 포함하여 어떠한 형태의 창작물이던지 이것을 정당한 방식으로 인용하지 않고 그대로 옮겨 적는 것을 사실상의 '도둑질'로 규정한다. 우리나라의 교육환경, 사회적 분위기와는 달라도 완전히 180도 다르다. 남이 쓴 글은, 그게 제 아무리 선생님이 아니라 선생님 할애비가 쓴 글이라 하더라도 절대로 그대로 베껴 써서는 안 되는게 사회 전체에 뿌리내린 철칙이다. 베껴 쓰려면 정확하게 '따옴표 붙이고, 저자 이름 적고, 연도와 출처 다 적고', 그러고 나서 적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무실에 출근하니 처제 식구들과 우리 식구들이 같이 들어가 있는 카톡방에 처제의 메시지가 올라와 있었다. 영어로 편지 쓰는 게 불편한 처제가 나에게 답장을 좀 대신 써달라는 요청을 한 것이다. '표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황에서 영어에도 익숙하지 않아 생긴 실수인 거 같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주겠다'는 취지로 짧게 써서 처제에게 보내줬다.


국제학교를 다니면서 우리나라 학교와 크고 작은 차이를 느끼는 때가 많이 있다. 어찌 보면 한국에서만 학교를 다닌 학생들이 가장 조심해야 할 이런 일들에 대해서 처제 가족들에게 미리 좀 조언을 해줬어야 하는데, 그걸 안 해주는 바람에 이런 일이 생긴 건 아닌지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이래저래, 타국에서의 삶을 살아가는 부모들도, 국제학교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는 학생들도 힘들고 고달픈 게 해외 생활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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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자신의 누나가 심하면 퇴학도 당할 수 있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듣게 된 6학년 짜리 남동생은 호기심이 발동해서 엄마에게 물었단다. "엄마. 표절하면 퇴학당하는 거야? 흠... 나도 학교 다니기 싫은데 그거나 해볼까?" 에휴... 철없는 둘째 조카는 처제한테 등짝 스매싱이나 맞지 않았으려나?


* photo by Dan Counsell on Unsplas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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