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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비와 호지의 아빠 Apr 18. 2022

보통 사람의 눈에는 그저 폐허였겠지만...

인도 도시 이야기 (4) : 님라나(Neemrana)

[# 1] 히틀러의 박해를 피해 쿠바로 가던 배안에서 태어난 아이...


1942년. 히틀러의 유태인 탄압을 피해 쿠바로 향하는 여객선에 올라탄 폴란드계 유태인 새신랑과 만삭의 아내는 하바나항 입항을 앞두고 있었다. 산통을 느낀 산모는 급하게 남편을 찾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똘망똘망하게 생긴 사내아이가 배 위에서 무사히 태어났다. 그 아이의 이름은 프란시스 바그지아(Francis Wacziarg, 1942-2014), 바로 이 글의 주인공이다. 

프란시스 바그지아(Francis Wacziarg). 폴란드에 정착한 유태계 가문이다 보니 전형적인 프랑스인의 성(family name)과는다른 상당히 이질적인 성을 물려받았다

회계사이자 변호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쿠바에 정착한 후, 네덜란드의 안트워프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유태인 보석상들과 나치의 박해를 피해 쿠바로 이주한 난민들을 상대로 영업을 시작했다. 그 덕에 프란시스는 (가족이 쿠바를 떠나는) 4살이 될 때까지 피델 카스트로 치하의 공산 쿠바에서 살게 된다. 파리로 돌아가 한창 대학에 재학 중이던 프란시스는 알제리의 독립 요구에 대한 프랑스의 무자비한 탄압 그리고 소위 '68 혁명'이라 불리는 사회주의 운동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경영학 석사(MBA) 학위를 받은 후 사회주의 사상에 동조하는 자신의 친구들과 인도를 방문했던 그는 자신의 친구들이 짧은 인도 체류를 마치고 돌아갈 때 홀로 인도에 남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벵갈, 퐁디체리(지금의 푸두체리), 카르나타카 등 인도의 방방곡곡을 돌아다녔고 인도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인도에 좀 더 머물러 있을 방안을 찾던 그는 봄베이(현재의 뭄바이)에 소재한 프랑스 대사관에 외교관으로 임용되어 4년간 근무했다. 이후 프랑스계 은행인 BNP 봄베이 지점에 잠시 근무한 후 얼마 안 되어 사업가로 변신한 그는 섬유 유통업체를 설립하게 되고 그 와중에 인도인인 아만 나뜨(Aman Nath)를 만나 친구이자 사업 파트너로서 30년을 함께 하게 된다.




[# 2] "어머, 이 성은 꼭 사야해!!!".... 님라나 성을 발견하다.


1981년, 중세시대 인도의 건축물과 프레스코 회화에 대한 책을 저술중이었던 아만 나뜨는 님라나 성(Neemrana Fort Palace)을 처음으로 방문했고 멋진 (그러나 상당부분이 폐허가 된) 500살짜리 고성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약 5년이 지난 1986년, 1,400년대부터 그 지역을 지배했던 유명한 라자(Raja, 힌디어로 '왕'이라는 뜻)의 후손에게 70만 루피(우리 돈으로 약 1,200만 원)를 주고 성의 소유권을 넘겨받게 된다.


조금은 즉흥적으로 뉴델리에서 140km나 떨어진 라자스탄 촌구석의 산등성이에 처박힌 망가진 고성을 사들인 그들은 이 폐허더미를 활용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을 시작했다. 이윽고, 그들은 이 고성을 약 5년간의 공사 후에 호텔로 개조하여 개장하게 된다. 참고로, 석조로 지어진 고성이 많은 프랑스에서는 이런 고성을 개조하여 호텔이나 골프장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프란시스에게는 딱히 어색한 사업모델은 아니었다.


님라나 성으로 들어가는 주 출입구... 웅장한 석조 기둥에 둘러싸인 출입구가 방문객을 압도한다


1991년 12개의 객실로 시작된 이 호텔은 입소문을 타고 매출에 불이 붙었고 수익을 재투자하면서 고성의 나머지 부분들도 모두 복원하여 지금은 객실이 77개에 이르는 제법 큰 부띠끄 호텔이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님라나 호텔 체인'은 현재 인도 전역에 약 25개의 호텔을 운영하는 호텔 체인으로 성장하였다.


님라나 성의 전경


[# 3] 보통 사람의 눈에는 그저 폐허였겠지만...


인도가 독립을 이룬 1947년... 인도의 곳곳에는 결핍과 가난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수백 년 동안 인도의 곳곳을 호령했던 무굴제국과 같은 큰 제국과 군데군데 흩어져 있던 작은 왕국들의 지배자들이 소유했던 건축물들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폐허가 된 채 방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을 복원하고 재건하려는 시도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영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기 직전 수백만 명이 아사하는 엄청난 기근을 겪었던 인도인들에게는 당장 먹고살기도 바쁜 하루하루가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고국에서 이런 고성들을 복원하여 호텔이나 골프장 등으로 탈바꿈시키는 사업모델을 흔하게 봐왔던 프란시스에게는 인도의 곳곳에 산재한 이런 문화재들이 그야말로 '노다지'였을 것이다. 이미 수십에서 수백 년에 걸쳐 프랑스에서 반복된 성공적인 사업모델과 세계 최고 수준의 문화재 복원 기술을 인도에 도입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렇다. 보통 사람들은 모두 무너져버린 폐허만 보고 있었을 때 누군가는 고성이 복원된 미래의 모습을 상상한 것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이미 펼쳐지고 있는 미래를 먼저 경험한 사람이 그 미래를 경험하지 못한 땅에서 미래를 현실화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 4] '미래를 먼저 경험'한다는 것...


21세기에도 '미래를 먼저 경험'한 고수들이 넘쳐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암호화 화폐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몇 년 전부터 이름도 생소한 가상화폐에 투자를 시작한 사람들도 있다.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며 살기도 어려운 개발도상국이 석탄을 때며 힘겹게 경제성장의 길을 걸어갈 때, 10년 아니 20년 후에나 현실화될 각종 기후변화 관련 국제적인 법령과 탄소 거래제도를 미리 연구했던 선진국들도 부지기수이다. 


세월이 흘러 개발도상국이나 빈곤국가가 겨우겨우 암호화 화폐 거래나 탄소배출권 거래에 뛰어들 때쯤이면 이미 이와 관련한 국제적인 거래 규범들이 선진국에 의해서 다 만들어지고 난 후일 것이다. 이제 개도국과 빈곤국가들에게는 선택지가 없다. 그저 오래전에 선진국들끼리 모여 앉아 세워놓은 법칙과 규정을 꼼짝없이 따라야 한다. 냉혹하고 무서운 국제 질서의 현장이다. 


'미래를 먼저 경험한다는 것', '비전을 갖는다는 것', 그리고 '그 비전을 실행에 옮긴다는 것'... 


이 모든 것이 개인뿐만 아니라, 회사와 조직, 그리고 더 나아가 한 나라가 앞으로 살아갈 몇 년 그리고 몇십 년의 미래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아닐까 생각하니 조금은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500년이 넘게 코딱지 만한 자신의 성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큰소리치며 살아왔던 왕족 가문은 현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모조리 몰락했다. 그리고, 500년이 지난 지금... 다가오는 미래를 대비하지 못하고 그들처럼 과거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 그리고 조직과 나라들은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가고 있을 것이다.  


님라나를 떠나 뉴델리로 돌아오는 길에 차창밖 풍경은 빈곤하고 황량한 인도 농촌의 풍경에서 점차 도시의 풍경을 바뀌었다. 마치 15세기에서 천천히 21세기로 진입하듯이 말이다.


///

각각의 호텔방에는 무슨무슨 마할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었다.


호텔에서 바라본 님라나 시내 전경



보는 순간 경탄을 금하지 못하는 님라나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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