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게도 발리는' 신세임에도 인도는 외교무대에서 큰 소리를 친다
* 이 글은 '세계 속의 인도(1):인도가 중국을 추월할 수 있을까 (https://brunch.co.kr/@hobiehojiedaddy/143)에서 이어집니다.
앞의 포스팅에서 살펴본 대로 인도가 경제적으로 중국을 추월하는 일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 인도가 계속해서 국제사회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는 뭘까? 국제사회를 향한 인도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메세지가 담겨 있을까? 지난번에 살펴본 '중국에도 무시당하는 인도'와는 다른 또 다른 인도의 '당당한' 모습을 살펴보자.
[# 1] 국제사회를 향한 인도의 목소리 : 제이샹카르(Jaishankar) 외무부 장관
2022년 3월 31일, 인도에서 인도와 영국 간의 향후 외교관계 강화를 논의하기 위한 '영국-인도 전략 미래 회담(India-UK Strategic Futures Forum)'이 열렸다. 영국의 외무장관인 엘리자베스 트러스도 하루 일정으로 인도에 도착해 인도의 외무부 장관인 수브라마얌 제이샹카르와 대담을 했다.
대부분의 외교 행사 특히, 공개적인 장소에서 벌어지는 외교 대담은 매우 정제되고 무덤덤하다 못해 지루하기까지 한 이야기가 오고 가는 자리이다. 듣기 좋고 말하기 좋은 도덕 교과서 같은 이야기들 말이다. 지루한 대담이 대충 끝나갈 무렵 청중 속에 있던 기자 한 명이 질문을 했다.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러시아로부터 대폭 할인된 원유를 더 많이 사들이고 있는 인도에 대한 영국의 의견은 어떠한가?"
영국 외무장관은 '인도는 주권국가이므로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다. (우크라이나의 핵포기를 대가로 안전보장을 약속한) 부다페스트 안전보장각서에 따라 우크라이나 국민들을 지지하지만, 영국은 다른 나라들에게 어떤 행동을 하라고 말할 수는 없다'라고 발언했다. 그냥 들으면 '인도가 어떤 행동을 해도 상관없다'라는 뜻으로 들리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교묘한 돌려까기식 발언이었다.
우선, 다른 나라도 아니고 인도를 200년 동안 식민지배했던 영국 외무부 장관의 입에서 '인도는 주권국가 이므로...'라는 발언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인도인들이 듣기에는 꽤나 기분 나쁠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200년이 넘게 인도를 온갖 수단을 총동원해 약탈했던 영국은 아직까지도 인도에게 식민 수탈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사과'하지 않고 있다. (식민 지배에 대해서 사과하지 않고 인색한 행태를 보이는 것은 일본만이 아니다..ㅠㅠ)
둘째로, '부다페스트 안전보장각서'는 미국, 러시아, 영국 등의 외교 당국자들이 1994년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 모여서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를 포기하면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서명한 문서이다. 우리나라 말로는 안전보장 '각서'라고 해석되지만 정확한 영문 명칭은 'Budapest Memorandum'이다.
자... 눈치 빠른 분들은 이미 알아챘겠지만 조약(Treaty)도 아니고 협정(Agreement)도 협약(Arrangement)도 아닌, 말 그대로 '메모'이다. 서명국의 의회가 서명해야 하는 공식적인 '조약'이나 '협정'이 아니란 말이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지켜지면 좋고 안 지켜져도 딱히 문제 되지 않을 만한 내용'을 서로서로 모여 앉아서 메모장에 끄적거린 내용이란 거다.
그러다 보니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했을 때인 2014년에 서방의 어느 나라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한 것이다. 영국 외무부 장관은 그 문서를 근거 삼아 '영국은 우크라이나 인들을 지지한다'라고 점잖게 훈수 두듯이 한마디를 한 것이다.
셋째로, '인도가 어떻게 행동하면 될지를 말하지 않겠다'라고 한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셨다면 그대는 지극히 순진한 사람이다. 이 말이야 말로 '영국이나 다른 서구 국가처럼 러시아를 제재하는데 인도도 동참하라'는 말을 돌려서 한 것이었다.
트러스 장관의 말이 끝나자마자 제이샹카르 인도 외무장관이 되받아쳤다.
'최근에 이 이슈(러시아의 원유 구매)가 거의 무슨 캠페인처럼 되어버렸는데... 내가 최근에 읽은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3월 중에 유럽 국가들은 지난달 대비 15%나 더 많이 러시아의 원유를 사들였다. 러시아의 원유를 사들은 국가들을 살펴보면 실제로는 모두 유럽 국가들이다. 인도는 실제로 총 원유 구입액의 1% 미만을 러시아에서 사들이고 있다.'
한 마디로 인도가 아니라 정작 유럽이 러시아의 원유를 대량으로 사들이고 있다고 면전에서 맞받아 친 것이다.
머쓱해진 영국의 트러스 장관도 '과거에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에너지 정책을 바꾸는 것은 어렵다'라며 실제로는 유럽이 러시아의 석유와 가스에 의존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수정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현장에서 인정했다. 영국의 외무장관이 영국 혼자서 착한 나라 인척 발언을 하며 폼을 잡자 인도 외무장관인 제이샹카르가 아주 멋지게 영국 외무장관에게 한방 먹인 셈이다. (문제의 발언은 아래의 클립에서 54:50초부터 보기 시작하면 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xijlIUUEnzQ
[# 2] 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 돈을 대고 있나? 인도인가? 유럽인가?
2022년 6월 3일 슬로바키아의 수도인 브라티슬라바에서 또 다른 포럼이 열렸고 여기서 제이샹카르 장관은 조금은 더 공격적인 질문을 받았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전후하여 인도가 러시아로부터 수입하는 원유의 양이 거의 9배나 늘었고, 배럴당 115달러에 달하는 브렌트유에 비해서 가격이 약 20달러 가량 싸게 러시아로부터 석유를 들여오고 있다. 전쟁을 기회로 돈벌이를 하는 것인가? 인도가 러시아의 전쟁에 돈을 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질문을 받자 제이샹카르 장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흘렀다. 마치 '그 질문 왜 안 하나했다'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속사포 같은 질문이 끝나자마자 그 모든 질문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조목조목 맞받아치기 시작했다.
"인도가 러시아의 전쟁에 돈을 대고 있다는 말이 있는데, 유럽이 러시아의 가스를 사기 위해 지급하는 막대한 돈은 그럼 무엇인가? 그 돈은 러시아의 전쟁에 사용되지 않는가? 좀 더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하다고 보인다. 게다가 인도가 러시아로부터 사들이는 원유가 9배나 늘었다고 하는데, 전쟁 이전 인도의 러시아 원유 수입량은 극소량이었다. 또한, (그렇게도 불량국가의 원유가 거래되는 것이 문제라면) 이란이나 베네수엘라의 원유는 아직도 세계시장에서 거래되고 있나? (문제의 발언은 아래의 클립에서 10:50초부터 보기 시작하면 된다. ㅎㅎ)
https://www.youtube.com/watch?v=9KwXJ-jlY44
[# 3] 세계는 모디를 어떻게 보고 있나?.. '국뽕' 아니 '인뽕' 한 사발에 거나하게 취해봅시다
마지막으로, 제이샹카르 장관이 최근 자와할랄 네루 대학에서 (최근에 발간된 나렌드라 모디 총리에 대한 전기(biography) 발간 축하연에서) 행한 특강을 보자... 제이샹카르 장관은 국제사회가 모디를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언급하고 있다. 물론, 상당 수준의 '국뽕' 아니 '인뽕'은 감안하고 들어야 한다. (동영상의 20:45초부터 듣기 시작하면 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3uf0mNy3_08
'모디 총리는 국제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Prime Minister Modi looms large on the world stage) 그의 정책과 이니셔티브도 파급력이 있지만 모디 총리에 대한 (다른 국가 정상들의) 개인적인 존경심도 존재합니다..'
크으.. ‘인뽕’ 한 사발이 제대로 담긴 제이샹카르 장관의 발언을 계속 들어보자.
'각국 정상들은 그를 인도인의 정수라고 봅니다. 그의 금식(독실한 힌두교도들은 정기적으로 금식을 한다)에 대해서 미국 정상이 얼마나 매혹되었고, 그의 요가 루틴에 대해서 유럽 정상들이 얼마나 관심을 보였는지 모릅니다..'
자아.. 이젠 뭐 '용비어천가'를 능가하는 '모디어천가' 쯤 되는 거다.
현직 장관들이 모여 앉아 현직 총리를 칭송하는 책을 출간하고는 우리로 치면 서울대쯤에 해당되는 대학의 총장, 부총장에 교수들 그리고 학생들 모아놓고는 이렇게 출판 기념회를 열면서 모디 총리를 입을 모아 칭찬하는... 살짝 '북한스러운' 모습이다. ㅎㅎ
제이샹카르 장관의 언급이 물론 과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취임한 이후로 인도의 국익에 근거한 자주적인 외교 행보가 더 강화된 것이 사실이다. 선진국 눈치 보지 않고 할 말은 꼬박꼬박 하는 인도의 행보가 더욱더 뚜렷 해지고 있는 것이다. 비록 경제적으로는 '중국에게도 발리는' 불쌍한 신세이지만 중국을 견제해야만 하는 서방세계 입장에서는 그나마 유일하게 의지할만한 나라가 인도라는 상황을 인도 역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인도 역시 큰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과의 대립이 점점 심해지면서 인도가 국제 사회에서 그 중요성이 훨씬 커진 것만은 사실이다.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이른바 IPEF(인도-태평양 경제포럼)를 포함해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모든 움직임에서 빠지지 않는 인도... 그러다 보니 몸값은 점점 올라가고...
이해타산과 계산 빠른 인도 입장에서 즐겁고 행복한 고민의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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