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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비와 호지의 아빠 Aug 17. 2022

5개의 도시로 알아보는 인도의 근현대사

콜카타, 뉴델리, 벵갈루루, 보팔 그리고 뭄바이...

지난 8월 15일은 인도가 독립국이 된지 75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인도의 파란만장한 근현대 역사를 콕 집어서 5개의 도시만을 이용해서 설명해본다면 어느 도시를 골라야 할까? 내 맘대로 골라서 살펴본 '5개의 도시로 살펴본 인도 근현대사'이다...



[# 1] ‘근대 인도(modern age of India)’가 시작된 곳 : 콜카타

 

때는 1857년 1월... 그렇지 않아도 열악한 대우로 인해 동인도회사에 대한 불만이 많았던 캘커타(현재 이름은 콜카타) 주둔 세포이 병사들을 더욱더 분개하게 만든 사건이 발생했다. 자신들에게 새롭게 지급된 머스켓 소총용 화약 종이에 소와 돼지의 기름이 발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세포이는 원래 페르시아어로 ‘용병’이라는 뜻으로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를 물리치며 지금의 인도와 인접 지역을 독차지하게 된 영국의 동인도회사(East India Company)에 고용된 인도인 병사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화약이 물에 젖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지만 소를 신성시하는 힌두교도에게도 돼지를 불결하게 여기는 이슬람교도에게도 새로운 화약 종이는 용서가 안 되는 물건이었다.


결국 1857년 3월 말 제34 벵골 보병연대 (the 34th Bengal Native Infantry Regiment) 소속 망갈 판데이(Mangal Pandey)가 새로운 화약 종이를 둘러싼 다툼 끝에 영국인 부사관을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항명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된 그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며칠 만에 교수형을 당하면서 세포이 항쟁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된다. 이후, 영국군 장교들에 대한 세포이 병사들의 저항과 공격은 아그라와 알라하바드 같은 서쪽의 도시로 점차 확산되었고, 최초의 대규모 무력 충돌은 델리 인근의 미루트(Meerut)에서 발생한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대부분의 나라들은 이 사건을 ‘세포이 항쟁’ 또는 ‘세포이의 반란’이라고 부르지만 인도인들은 1857년 독립전쟁이라고 부른다. 160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영국인들의 인도 ‘진출’로부터 거의 250년 정도 지속된 영국의 지배에 저항한 인도인 최초의 조직적인 무력투쟁이기 때문에 인도인들에게는 이 사건이 자랑스러운 사건일 수밖에 없다. 대규모 무력충돌은 1857년 5월 미루트에서 발생했고 그 이후 인도 전역으로 퍼져나갔지만 세포이 항쟁의 최초 발단은 캘커타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국의 인도 ‘진출’ 당시 인도의 중부와 북부를 지배하고 있던 무굴제국(수도 : 델리)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동인도회사가 고른 도시가 바로 인도 북동부의 벵골만에 위치한 캘커타이다. 영국의 식민지배를 상징하는 바로 그 도시에서 세포이 항쟁의 깃발이 처음으로 나부끼기 시작한 것이다. 인도인들은 식민지배의 부당함을 자각하고, 인도인들이 인도인들을 위한 투쟁에 나선 첫 사건인 1857년의 세포이 항쟁을 ‘근대 인도(modern age of India)’의 시작점이라고 본다. 그렇기에 캘커타라는 도시는 ‘근대 인도’가 시작된 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 2] 인도가 몰락하고 새로운 인도가 시작된 곳 : 뉴델리


한편, 1857년 5월 11일, 미루트를 수중에 넣은 세포이 병사들은 멀리 떨어지지 않은 델리에 수월하게 진입했다. 혁명의 구심점이 필요하다고 느낀 그들은 쇠락한 무굴제국의 황제인 바하두르 샤 자파르(Bahadur Shah Zafar)를 ‘인도의 황제’로 추대하였다. 약 1년 2개월간 지속된 무력 충돌은 점차 현대식 무기와 물자를 갖춘 영국군의 우세로 기울어져갔고 결국 인종이나 종교 그리고 카스트에 상관없이 대부분의 인도인이 참여했거나 동조했던 세포이 항쟁은 아쉬운 실패로 끝나게 된다. 바하두르 샤 자파르는 체포되어 당시 영국령이었던 미얀마로 내쫒겼고 이로서 1526년부터 인도를 지배했던 마지막 이슬람 왕조인 무굴제국도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세포이 항쟁 이후 인도의 많은 것이 바뀌게 된다. 우선, 동인도회사를 통해 인도를 간접 지배해오던 영국은 1877년 공식적으로 인도를 영국의 식민지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빅토리와 여왕이 인도의 군주가 된 것이다. 그 이후 세포이 항쟁과 같은 대규모 반란이 또 일어날 것을 두려워한 영국은 인도의 독립운동 움직임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반영 정서가 강해진 벵골만의 콜카타를 버리고 자신들이 멸망시킨 델리로 수도를 옮기기 위한 준비에 들어간다. 1912년 무굴제국의 수도였던 올드 델리와 인접한 남쪽 지역에 뉴델리라는 이름의 계획도시가 완공되었고 이후 영국의 인도 통치는 뉴델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결국 무굴제국으로 대표되는 ‘과거의 인도’는 올드 델리에서 그 마지막 생명을 마쳤고,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영국의 식민지배 역시 뉴델리로 수도를 옮긴 지 불과 35년 만에 막을 내렸고 인도는 독립을 쟁취했다. 그러고 보면 ‘과거의 인도’가 몰락하고 ‘새로운 인도’가 탄생한 뉴델리야 말로 인도의 현대사를 대표하는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이후 파키스탄과 인도가 분리 독립하면서 파키스탄에 거주하던 약 470만 명의 힌두교도와 시크교도가 인도로 이주하였고 뉴델리는, 마치 한국 전쟁 이후의 서울이 그러하듯, 피난민들과 이주민들이 주축을 이루는 도시로 재탄생하게 된다.


[# 3] 인도의 미래를 상징하는 도시 : 벵갈루루


1947년 독립 이후 인도의 성장 속도는 느리기만 했다. 1964년까지 인도 초대 총리를 역임했던 자와할랄 네루는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어 거대한 신생 독립국 인도를 소비에트식 계획경제 체제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네루가 사망한 후 그의 딸인 인디라 간디가 1984년까지 총리를 역임했지만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주요 산업에 대한 국유화, 외국 자본의 인도 진출 금지, 각종 인허가 제도 강화를 통한 소비재 산업 통제 등 전형적인 사회주의적 경제 체제가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대만, 한국, 중국 등 인도와 비슷한 시기에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한 경쟁국가들은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받아들여 눈부신 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인도의 학계와 산업계는 사회주의 경제라는 좁은 우물에 갇혀 방향성을 상실한 인도 경제를 성장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1980년대 초반 뉴델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남인도의 도시 벵갈루루에서 작지만 소중한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벵갈루루는 인도 군수산업의 중심지였는데, 해발고도 약 900미터에 위치하여 쾌적하고 살기 좋았던 기후와 군수산업에 종사하는 젊고 유능한 과학자들이 사는 생활환경은 그 당시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성장하는 정보통신산업 종사자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하였다. ‘인도의 실리콘 밸리’라고 불리는 벵갈루루가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갖춰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를 즈음하여 인도의 3대 정보통신 업체 중 하나인 인포시스(Infosys)도 벵갈루루에 둥지를 틀었고, 지금은 위프로(Wipro)를 포함한 무수한 다국적 IT 기업이 자리 잡은 도시가 되었다. 한 마디로 인도 경제의 미래를 상징하는 도시가 된 것이다.


[# 4] 보팔 : 인도 산업화의 참혹한 트라우마     


1984년 12월 3일 새벽. 인도 중부 마디아 프라데시주의 주도인 보팔(Bhopal) 시내에 죽음의 가스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보팔에 소재한 농약 및 해충제 제조회사인 유니온 카바이드의 인도 생산공장에서 맹독성 물질이 수십 톤 누출되었고 곤히 잠들어 있던 보팔 시민들을 덮쳤다. 사고 당일에만 3,000명이 넘게 사망하였고, 후유증으로 인해 사망한 사람까지 합하면 최소 1만 6천 명에서 2만 명에 이른 것으로 추산된다. 공식적으로 기록된 부상자 수는 57만 명을 넘어선다. 한마디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산업재해가 인도 한복판에서 발생한 것이다.


보팔 가스 누출 사고는 이제 막 산업화의 길에 들어선 인도가 겪은 끔찍한 사고였다. 이를 통해 다국적 기업의 무책임한 안전관리, 인도 정부의 고질적인 무능력, 가난하고 힘없는 국민들의 편에 서지 않는 인도 사법 권력의 민낯이 드러났다. 더욱더 안타까운 것은 사고 발생 40년가량이 경과한 지금도 인근 지역의 토양과 수질은 심각한 수준으로 오염되어 있으며, 2대, 3대에 걸쳐 다양한 장애를 가진 후세들이 태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피해자 가족들은 인도 정부가 제대로 된 지원을 제공하지 않고 있다며 매년 사고 발생일인 12월 3일에 정부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인도인들은 수백 년에 달하는 무슬림과 제국주의 세력의 지배로 인해 피해의식에 시달려 왔다. 그리고 그들은 외세를 이기는 방법은 ‘자립과 자조’ 뿐이라고 여기며 해외 자본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배타적 태도를 가져왔었다. 그런 인도 국민들에게 보팔 가스 누출 사고는 잊을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고 이 상처는 지금도 여전히 치유되고 있는 중이다.


[# 5] 뭄바이 : 금융과 테러의 도시


인도의 현대사를 다섯 개의 도시로 알아보는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는 인도는 물론이고 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인 뭄바이이다. 남아시아 금융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지만 지난 수십 년간 크고 작은 테러에 시달린 도시이기도 하다. 뭄바이가 경험한 테러 중 가장 ‘인도스러운’ 사건은 2008년에 발생한 뭄바이 테러사건이다.


2008년 11월 26일 밤늦은 시간에 뭄바이의 중심가에 소재한 주요 호텔과 카페가 순차적으로 테러의 표적이 되었다. 정치권은 허둥지둥이었고 권총과 몽둥이 그리고 2차 대전에서 사용되던 구식 장총을 손에 쥔 인도 경찰의 초기 대응도 어설펐다. 인도에 하나뿐인 대테러 전문부대는 1,400km나 떨어진 마네사르(Manesar)에 주둔 중이었는데, 이들은 타고 갈 비행기를 구하지 못해 최초 상황 발생 후 10시간이 되어서야 테러 현장에 도착하였다. 그 10시간 동안 불과 3개월간의 테러리스트 훈련을 받은 10명의 젊은이들은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며 AK 자동소총과 수류탄으로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170명에 가까운 무고한 인명을 앗아간 테러리스트들이 다 소탕되고 상황이 종료된 것은 무려 3일이나 지난 11월 29일이었다.


2008년 뭄바이 테러는 인도가 처한 정치, 군사적 상황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이 테러를 저지른 조직은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할하여 통치하고 있는 카슈미르 지역을 파키스탄이 완전하게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단체였다. 파키스탄과 인도와의 끊이지 않는 국경 분쟁이 뭄바이라는 국제적인 도시에서 엄청난 테러가 일어나는 도화선이 된 것이다. 인도의 가장 유명한 도시를 꼽아보라면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뭄바이를 꼽을 것이다. 


실제로 뭄바이에는 많은 수의 외국인들이 거주하고 있고 수십층짜리 고층 건물들과 자산이 수십조에 달하는 금융기관 수십 개가 모여 있는 화려하고 부유한 도시이다. 하지만 이런 마천루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빈민가인 다라비(Dharavi) 슬럼이 형성되어 있으며, 현재 인도의 집권 세력인 BJP 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뒤지지 않는 강경힌두주의 정치세력인 쉬브 세나(Shiv Sena)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인도가 떠안고 있는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모순이 모두 모여있는 도시이다.


캘커타에서 시작된 근대 인도의 불꽃은 뉴델리에서 독립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맞이하면서 크게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독립 이후 약 수십 년간 지지부진을 거듭하던 인도의 경제성장과 빈곤퇴치는 산업화와 경제자유화가 시작된 1980년대 이후에서야 본격화되었다. 보팔 가스누출 사고에서 보듯이 경제성장의 길이 항상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인도인들은 자기들의 손으로 인도의 실리콘 밸리라 불리는 벵갈루루를 창조하면서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물론, 뭄바이의 사례에서 보듯이 인도가 지금 직면한 복잡하고 다층적인 문제점들이 인도라는 거대한 코끼리가 걸어 나가는 앞길에 버티고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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