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걸어다닐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삶은 행복하다
인도에 4년이 조금 안되게 살면서 가장 안타까운 점은 걸어 다니기가 너무 힘들다는 거다. 1년 중 거의 9개월 가까이 무더위가 지속된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이다. 피부를 따갑게 찌르는 햇볕 아래에서 땀으로 범벅이 될 각오를 하지 않는 한 웬만하면 10분 이상 걷기가 힘들다.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는 소와 개를 포함한 각종 동물들도 나의 산책을 방해하는 것들 중 하나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도로 설계 또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잘 이어지는 듯하던 인도가 갑자기 끊어지거나 분명히 횡단보도가 있어야 할 자리에 떠억하니 대신 들어앉아 있는 중앙분리대를 만나면 40도를 육박하는 길거리에서 한숨과 탄식만 나올 뿐이다.
왜 이리도 뉴델리는 걷기 힘든 도시가 되어버린 것일까? 많은 해석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해석은 '역시나' 식민지배의 잔재이다. 인도에 진출했던 영국 식민지배자들은 마치 영국 교외에 성을 건설하듯 뉴델리에 자신들의 거주지를 널찍하게 만들었다. 어차피 자신들의 식민지가 된 땅이었니 눈치 볼 것도 없었고, 좁게 지을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지금도 뉴델리 곳곳에는 수천평은 족히 될만한 커다란 맨션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관공서와 맨션들을 연결하는 도로를 건설할 때 '당연하게도' 마차가 다니는 차도는 정성들여 만들었겠지만 돈 없고 힘없는 인도 현지인들이 이용할 인도는 '당연하게도' 관심 밖이었을 것이다.
독립한 인도 정부가 물려받은 것은 영국 식민지배자들이 남기고 간 각종 건물만이 아니었다. 식민지 시대의 도시 건설 철학 또한 독립 이후에도 인도에 남아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독립 이후 넉넉하지 않은 형편으로 나라를 운영해 온 인도 정부 입장에서는 힘 있고, 돈 있고, 목소리 큰 세력들이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고속도로와 차도는 열심히 만들었지만 힘없고, 돈 없고, 목소리 작은 세력들이 편하게 걸을 수 있는 인도는 만들지 않았다. 그 덕분에 인도는, 그중에서도 내가 살고 있는 뉴델리는 걸어 다니기에 너무나도 힘든 도시가 되어버렸다.
그에 비해 2014년부터 3년 동안 거주했던 프랑스의 파리는 그야말로 산책의 도시, 걸어 다녀야만 하는 도시였다. 심지어는 시민들이 걸어 다니기 편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파리시는 지속적으로 시내 주차 공간을 줄이고, 공용주차장의 주차요금을 꾸준히 인상하고 조금이라도 미세먼지 지수가 높아졌다 싶으면 파리 시내로 차량이 진입하는 것 자체를 막았다. 한마디로 걸어 다니기 좋은 도시를 넘어 걸어 다녀야만 하는 도시로 점점 변화하고 있었다. 걸어 다니기 좋은 도시일수록 평등과 민주주의 이념이 생활 속에 뿌리내린 도시이고 걸어 다니기 어려운 도시일수록 차별과 불평등이 생활 속에 깊이 스며든 도시라고 이야기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오랜만에 본국으로 검진휴가를 나오면서 임시숙소를 강남역 근처에 잡았다. 아이들이 다녀야 할 입시학원과의 거리를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부수적인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바로 산책할 수 있는 기쁨이다. 임시숙소에 투숙한 첫날 건물을 빠져나와 걸음을 몇 발자국 옮기니 지하철 강남역이 눈에 보였다. 10여분 걸어서 올라가다 보니 신논현역... 교보문고 강남점이 있는 곳이었다. 어찌나 반갑던지... 산책 끝에 발견한 서점이라니 이보다 더 즐거운 발견은 없다. 오랜만에 서점에 들러 이것저것 책도 들여다보고 사고 싶던 책도 샀다. 한국에서 살았다면 너무나도 당연하게 누렸을 이러한 혜택들이 인도에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호사이다.
오늘은 시내버스를 타고 잠깐 이동하여 코엑스 앞에서 내렸다. 아내와 함께 천천히 산책하며 올라가 봉은사에 도달했다. 나와 내 아내 모두 불교신자가 아니다 보니 특별한 종교적인 감동은 없었다. 하지만, 감동은 잠시 후에 찾아왔다. 눈을 들어 보니 우뚝 솟은 마천루 빌딩이 낮고 고즈넉한 절집과 멋들어진 대비를 이루는 게 아닌가? 누군가는 저 높은 빌딩 속 사무실에서 바삐 일하고 있지만, 누군가는 이곳 사찰의 법당에서 영원과 맞닿은 기도를 간절하게 올리고 있다는 사실이 묘한 감동을 주었다. 사무실속 누군가도 법당 속의 누군가도 그저 그 순간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짠해졌다.
대웅전 뒤쪽으로 난 조그만 산책로에 들어서는 순간 귓전에 울려대는 매미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평온함이 나를 감싸기 시작했다. 서울 시내 한복판 그것도 땅값 비싸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강남 한 복판에 이렇게 나무가 우거진 산책로가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감사할 따름이었다. 습한 날씨에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지만 산책이 주는 즐거움, 걸어 다닐 수 있다는 도시에 살고 있다는 것이 주는 희열이 오랫동안 나를 즐겁게 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