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두분은 무사히 여행을 하셨을까?
지난 주말 시골에 있는 본가에 내려갔다. 4년만에 한국에 귀국해서 아직까지도 '한국에 새롭게 정착중'인 상황이다 보니 시외버스를 이용해 시골에 내려가게 되었고 본가에서 올라오는 길에도 다시 한번 시외버스를 이용하게 되었다. 몇 년만에 방문한 고향의 버스 터미널은 주말인데도 불구하고 한적했다.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만 천천히 오고가는 한적하다 못해 쓸쓸한 터미널 대기실 의자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였다. 웬 낯선 할머니 한 분이 나에게 걸어오시더니 승차권 자동 발매기 사용법을 알려달라고 청하시는 것이었다. 키오스크 방식의 승차권 자동발매기는 우리 같은 젊은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어렵지 않은 기기이겠지만 시골에서 농사 지으시며 신문물에 접할 필요가 없는 어르신들에게는 꽤나 낯설고 힘든 물건일 것이다. 언제 어디를 가고 싶으신지 물어서 화면을 몇번 터치하고 나니 승차권이 스르륵 출력되어 나왔다. 나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남기고 그 어르신은 대기실 의자에 자리잡고 앉으셨다.
내 자리를 찾아 앉기도 전에 승차권발매기 옆에 서 있던 노부부가 나에게 다가왔다. 역시나 승차권 자동발매기 사용을 도와달라는 말씀이셨다.
할머니 : 젊은 양반, 우리도 좀 도와주시구랴.
나 : 어디까지 가세요?
할아버지 : 인천공항이요.
할머니 : 1월 XX자 인천공항 가는 첫차 예약해야 되요.
나 : 아. 그러세요? 해외여행 가시나 봐요.. 그런데 인천공항 1터미널인가요? 2터미널인가요?
할아버지 : 어허... 우린 그런거 모르는디. 어이 임자. 애들한테 전화 좀 걸어봐.
할머니 :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 모두에게 전화걸어 보신후) 둘다 안 받는데 어쩐댜?
나 : 혹시 예약하신 항공편명 좀 알 수 있을까요?
할머니 : (핸드폰으로 도착한 문자 메시지를 보여주시면서) 일전에 이거 받았는데 보시유.
나 : 아. 네. 항공편을 보니까 1터미널이겠네요. 그나저나 아침 여덟시에 이륙하는 비행기 타시려면 새벽부터 서두르셔야 겠네요.. 같이 예약해 보시죠.
모르긴 몰라도 서울과 시골 여러 곳에 흩어져 사는 노부부와 자식들이 오랜만에 큰 맘 먹고 다 같이 해외여행을 가기로 한 듯 보였다. 자식 덕에 해외여행하시는 노부부는 시골 노인답지 않은 조곤조곤한 말투와 상냥한 태도를 가지셨다. 그런데, 문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졌다. 승차권 발매기를 몇번 터치해서 그 날짜를 찾아들어가 보니 새벽 4시 좀 넘어서 출발하는 첫차는 물론 그 다음 버스까지 모두 매진인 것이 아닌가?
나 : 어? 이거 어쩌죠? 매진이예요. 그 다음 버스도 매진이고요. 어쩌요?
할머니 : 어허. 이거 워쩐댜? 일 났네.
할아버지 : 어이구. 이거 공항 어떻게 간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인천공항까지는 백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인에, 꼭두새벽에 버스도 없다면 갈 방법이 난감하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아침 비행기를 타야하는 다른 사람들은 이미 발빠르게 다 예약을 해버렸지만, 날렵하지도 발빠르지도 않은 이 노부부는 이제 공항에 가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즐거워야할 가족들끼리의 해외여행이 출발 전부터 암초에 부딪친 것이었다.
불과 십몇년 전만 해도 고속도로를 운행하는 버스에 버젓이 입석표가 존재했었다. 버스 출발시간이 임박해서 급하게 표를 구매한 사람들이 앉아서 가지는 못하더라도 입석으로 목적지까지 갈수는 있었다. 하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안전에 대한 기준이 강화되면서 이제는 예전처럼 입석표를 끊고 버스에 슬그머니 올라설 수 있는 길도 사라져버렸다. 좌석이 매진이면 안타깝지만 그걸로 끝이다. 게다가 내 고향 동네 역시 인구 감소를 피해가지 못해 터미널 창구에서 일하던 사람이 하나둘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아예 유인 창구를 폐쇄해버렸다. 농사짓는 순박한 노인들 앞에 무인 승차권 발매기 몇 대만 덩그러니 남겨놓고 창구 직원들은 모두다 정리해고된 것이다. 사람을 붙잡고 하소연 하고 싶어도 그럴 사람이 없다. 젊은 사람들이 눈깜짝할 사이에 뚝딱 사용하는 휴대폰용 승차권 구입 애플리케이션은 이분들에게는 먼 달나라 이야기이다. 이제 남은건 터미널 대합실에 세워져 있는 무인 승차권 발매기 뿐이다. 하지만, 사용하지도 못 한다면 무인발매기가 무슨 소용이 있겠나? 정작 가장 필요한 때에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늘씬하게 생긴 초현대식 기계가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데 큰 딸 호비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호비 : 아빠. 시간 됐어. 우리 이제 버스 타야 돼.
나 : 어. 벌써 그렇게 되었나? 알았어. 가자.
저기 어르신 정말 죄송해요. 제 버스가 출발하려고 해서요. 저 가보겠습니다.
무인승차권 발매기 앞에 그 노부부를 놔두고 돌아서는데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농촌 인구가 줄어든게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이제 농촌에 사시는 노인들에게는 차타고 돌아다니는 일상적인 일마저 젊은이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해결하기 힘겨운 과제가 되어버렸다. 하물며, 아침 일찍 출발하는 항공편에 올라타는 일은 이제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린 모양새이다. 터미널 대합실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서 있던 그 노 부부는 한참동안이나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고, 나와 호비를 태운 버스는 터미널을 정시에 출발했다. 단 1분도 늦지 않게 기계처럼 정확하게 말이다. 그리고 입석으로 탑승한 승객은 당연하게도 한 명도 없었다.
그 노 부부는 무사히 해외여행을 가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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