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간 부모의 품을 떠나 더 넓은 ‘코스모스’로 떠날 아이들에게
인구가 2만 명 남짓되는 '읍' 소재지에서 태어난 나에게 고향은 '떠나고 싶은 곳'이었다. 자전거를 타면 동네 끝에서 끝까지 10분이면 닿을 수 있는 시골... 집 밖으로 나서기만 하면 어김없이 마주치는 동네 어른들, 끝없이 마주치는 그분들에게 수십 번 인사하지 않고서는 길을 걷는 것조차 불가능한 숨 막히는 작은 동네...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해 보고 싶다는 동경이 한없이 커져갔다.
나는 내가 이렇게
진짜 (우주비행) 임무를 위해
우주에 오리라고는 꿈도 못 꾸었지...
내 고등학교 동창들 대부분은
고향마을도 떠나지 않았는데
나는 이곳 우주에 와 있어...
I never dreamed that
I'd ever get to this
something like this
- come up here on a real mission.
Most of the guys
I graduated high school with
never even left home...
and here I am."
다행히 운이 좋아 고등학교는 좀 더 큰 도시에서, 대학교는 서울에서 다녔다. 깡촌 출신 우물 안 개구리에게 '인 서울' 대학이라니... 기적이었다. 영화 '아폴로 13호'에 등장한 우주 비행사 Fred Haise의 대사는 열아홉 살에 상경해서 지하철을 처음 타본 시골뜨기에게 '아, 이건 내 얘기다'라는 감탄을 불러일으킬만했다. 같은 중학교를 졸업한 친구 중에 고향을 떠난 애들을 한 손으로도 꼽을만했던 나는 그때부터 우주까지는 아니어도 다른 세계를 꿈꾸기 시작했다.
감사하게도 대학을 졸업하고 운 좋게 '4대 보험도 되고 월급도 꼬박꼬박 나오는' 지금 직장에 취업했다. 가난하고 후진 동네를 탈출했다는 오만한 생각에 어깨가 우쭐해졌다. 변호사가 되고 의사가 된 소위 '잘 나가는' 동창들 만큼은 아니어도 어디 가서 이름 대면 그래도 '아, 그 회사?'라고 알아주는 회사라는 것도 은근히 기분 좋았다. 치열한 회사 내부 경쟁을 뚫고 해외 주재원으로 선발되어 근무하면서 콧대 꽤나 높아졌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회사생활에서도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내가 두 번의 선진국 생활을 '꿀 빨며' 즐기고 있는 동안, 묵묵하게 본사에서 궂은일을 하던 동료들이 하나둘 나보다 먼저 승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나에게는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인사평가등급이 통보되고 있었다. 아무도 나에게 말해주지는 않았지만 회사의 메세지가 뭔지 짐작이 갔다.
내 기억이 닿는 인생의 첫날부터 지금까지 마치 끝도 없는 사다리를 기어오르듯,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뱃사공의 심정으로 하루도 쉬지 않고 노를 저으면서 살아온 것 같은데... 허탈한 느낌이 들었다.
"아, 이대로 그냥 경쟁에서 밀려나는 건가?"
하필 그 시기에 첫째 딸은 다시 한번 해외에 나가자고 보채기 시작했다. 내 속도 모르면서 말이다. 여기서 한번 더 해외근무를 나가게 되면 본사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완전히 밀려나게 될 거라는 게 자명했다. 딸의 말만 듣고 자청해서 사회생활의 무덤을 파고 들어갈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딸이 저렇게 간절히 원하는데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난감했다. 게다가, 나갈 수 있는 나라도 후진국 밖에 없다는 점 또한 마음에 걸렸다.
한참을 고민하던 나에게 명쾌한 대답을 제시해 준 사람은 언제나 그렇듯 아내였다. 세속적인 성공에 아등바등하지 않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두려움도 없는, 그리고, 아직도 소녀와 같은 호기심과 맑은 심성을 지닌 사람의 조언은 한마디 한마디가 따뜻하고 지혜로웠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2020년 1월 인도에 도착했다.
물론, 인도에 도착한 지 약 1년 반이 지난 지금, 처음에 예상했던 상황과는 너무나도 많은 것이 달라져 있다. 아이들을 국제학교에 보내는 거 빼놓고는 모든 면에서 부족한 것 투성이인 이 나라에 승진도 포기하고 온 셈인데, 코로나 사태로 인해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된 것이다.
아이들이 제대로 학교에 간 날이 손으로 꼽을 정도이고, 하루에도 몇 시간씩 줌으로 온라인 수업을 듣는 아이들은 짜증과 스트레스로 가득 차 있다. 아내는 ‘밥 먹고 돌아서면 또 밥해야 되는’ 하루하루를 보내며 힘겨워 하고 있고, 나 또한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의 공포와 싸우며 출퇴근을 하느라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다. 사실상의 자택 격리를 1년 넘게 견뎌내고 있는 우리 가족의 생활은 궁상맞고 살짝 서글프기까지 하다.
하지만, 최대한 긍정적인 마음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불과 몇 년 후 대학에 들어가면 이제 자기 또래 친구들하고 어울리느라 엄마 아빠는 안중에도 없을 아이들이다. 그런 아이들과 이렇게 꼭 붙어서 하루 24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은 지금이 거의 마지막 기회가 아닐까 생각한다. 다른 집에서는 고등학생 딸이 아빠한테 말도 걸지 않는다는데, 아직까지도 아빠한테 이런저런 말도 걸어주고, 보드게임에도 끼어주고, 몇번을 듣고서도 기억 못하는 아이돌 그룹 멤버 이름을 물어볼때마다 다시 가르쳐주는 착한 두 딸들에게 고마워하며 하루하루 지내야겠다.
첫째 딸 호비가 어찌나 심심했는지, 책꽂이에 꽂혀있는 '코스모스'를 집어 들어 읽기 시작했다. 내 젊은 시절 처음 읽고 받았던 신선하고 감동적인 충격을 잊을 수 없는 내 인생 최고의 책을 아이들과 같이 공유하게 되었다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과학을 좋아하는 둘째 딸이 먼저 읽고는 과학을 딱히 좋아하지 않는 자기 언니에게 ‘언니는 잠 안 올 때 읽으면 도움이 될거야’라고 추천해줬단다.ㅎㅎ)
이제, 나는 우주로 갈 일도 없고, 우주로 가기 위해 더 이상 악다구니치며 살 일도 없을 거 같다. 그저 지금의 이 순간을 행복하고 충만하게 가족과 공유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아이들의 성장을 힘껏 도와주고, 언젠가 시간이 되면 나와 아내의 품을 떠나 더 넓은 코스모스로 독립해서 나가게 될 아이들의 미래를 축복할 마음의 준비를 해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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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oto by Greg Rakozy on unsplas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