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칸 영화제 수상감독에게 인도 정부가 소송을 걸다(1)(https://brunch.co.kr/@hobiehojiedaddy/230)에서 이어집니다.
[# 1] 인도에 '발리우드'만 있는 게 아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비록 주요 부문은 아니지만 상도 받았고, 칸 영화제에서도 2등 상에 해당하는 그랑프리도 수상했으니 '발리우드(Bollywood) 영화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라고 말해도 되는 것일까? 대답은 '아니올시다'이다. 사실은 <빛으로 상상하는 모든 것>과 <RRR> 모두 '발리우드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 영화계가 인도 영화를 알아보기 시작했다'는 말은 맞지만 '발리우드 영화에 주목했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엥? 인도 영화면 다 발리우드 영화 아닌가요?'라고 질문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 시점에 우선 '인도영화 발리우드 영화'라는 것부터 설명해야 할 듯하다.
그러려면 인도의 지리적·언어적 특성을 상기해야 한다. 일단 인도는 우리나라의 약 30배가 넘는 면적에 총 28개의 주(state)와 8개의 연방직할지(Union Territory)로 구성된 국가로 동서와 남북의 길이가 각각 3,000km가량인 거대한 국가이다. 그렇다 보니 5,000만 명 이상이 제1언어로 사용하는 언어만 7개가 넘는 인종과 종교 그리고 언어의 용광로이다. 자연스레 언어별로 지역별로 서로 다른 영화중심지가 인도 곳곳에서 발달해오고 있다.
우선 뭄바이(옛 이름 봄베이)를 중심으로 하는 '발리우드'가 인도 영화산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발리우드 영화는 매년 제작되는 약 1,500-2,000편의 인도 영화 중 제작 편수로는 1/4가량을 차지한다. 전체 박스 오피스 수익에서는 이보다 조금 높은 30~40% 정도를 점한다. 우리가 흔히 인도 영화라 하면 떠올리는 특징이 발리우드 영화에서 나타난다. 3시간이 넘는 영화 한 편에 로맨스·공포·액션·스릴러를 한꺼번에 버무려 넣는 바람에 영화 상영 내내 관객들에게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겪게 하다가 때때로 모든 출연자가 맥락 없이 노래 부르고 춤을 추는 그야말로 괴랄하고 신박한 영화다. 이렇다 보니 온갖 종류의 재료를 때려 넣어 만든 인도 음식 마살라(masala)에 빗대어 '마살라 영화'라고 불리거나 'ABCD 무비(Anybody can dance movie)'라는 우스꽝스러운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인도 남동부의 안드라 프라데시州와 텔랑가나州에서 주로 쓰는 텔루구어를 기반으로 제작하는 영화는 하이데라바드에 있는 톨리우드(Tollywood)에서 주로 만든다. 제작 편수나 박스오피스 수익 면에서 발리우드 영화를 바짝 추격하고 있다. 발리우드 영화가 화려하고 멋진 군무(群舞) 장면으로 유명하다면 톨리우드 영화는 중력과 물리의 법칙을 무시한 해괴망측한 액션씬으로 유명하다. 2023년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기염을 통했던 RRR도 텔루구어로 만들어진 톨리우드 영화이다. 인도 영화사상 최고의 제작비인 7,000만불(55억 루피)을 들여 톨리우드 특유의 황당한 액션씬을 정교한 CG로 대체하면서 서양 영화 못지않은 퀄리티를 만들어 낸 것이 흥행의 요인이었다.
안드라 프라데시州에 인접한 타밀나두州의 코담바캄(Kodambakkam)은 타밀어 영화를 만드는 콜리우드(Kollywood)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콜리우드 영화는 실소가 터져 나오는 슬랩스틱 코미디 영화와 톨리우드 못지않은 황당한 액션씬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곳의 영화배우들은 스크린 밖에서 더 유명하다. 영화배우에 대한 개인숭배가 살짝 비정상적인 수준까지 이르러 여러 명의 배우 출신 유력 정치인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타밀나두 지역 정계를 '꽉 잡고' 있는 AIADMK당(All India Anna Dravida Munnetra Kazhagam)을 창당하고 1977년부터 무려 10년간 타밀나두 주지사를 지냈던 마루뚜르 라마찬드란(Maruthur Gopalan Ramachandran)과 그의 후계자이자 역시 유명 여배우였던 자야람 자야랄리타(Jayaram Jayalalithaa)가 가장 유명하다. 자야랄리타가 2016년 지병으로 사망하자 상심한 그녀의 지지자 수백 명이 쇼크로 사망하거나 또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인도 영화 산업에 '노래하고 정신없이 춤추고(발리우드)', '맨손으로 총알을 쪼개고(톨리우드)', '광적인 추종자들을 몰고 다니는(콜리우드)' 영화만 있는 건 아니다. 인도 북동부 웨스트 벵골의 콜카타는 인도 예술영화를 만드는 중심지이다. 뭄바이 인근의 푸네(Pune)에는 이미 1960년부터 영화예술인을 양성하는 국립 필름텔레비전학교(Film and Television Institute of India; FTII)가 설립되어 운영 중이다. 우리나라 한국예술종합학교와 유사한 곳이라고 보면 되겠다. 파얄 카파디아 감독도 바로 이 학교를 졸업했다
[# 3] 그랑프리 수상 직후 가야 할 곳이 재판정
파얄 카파디아가 그랑프리를 수상하는데 인도 정부나 발리우드로 대표되는 대중영화계가 도움을 준 게 없다. 하지만 수상 소식이 전해지자, 인도 정치인들과 대중영화 종사자들이 숟가락을 올리기 시작했다. 나렌드라 모디 총리를 비롯한 여러 정치인이 축하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녀의 모교인 FTII도 자체 X(옛 트위터) 계정을 통해 'FTII 동문이 칸에서 역사를 만들었다'라고 멘션을 날렸다. 정작 카파디아의 영화제작에 손톱만큼도 도와준 게 없는 사람들이 신난 것이다. 자, 이제 칸에서의 꿈같은 시간을 마치고 인도로 귀국하는 카파디아 감독을 기다리는 것은 무엇일까? 나렌드라 모디 총리와의 만찬? 자신이 졸업한 모교(FTII)에서 후배들에게 전하는 멋진 연설? 모두 아니다. 오는 6월 말에 그녀는 재판정에 서야 한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렌드라 모디가 총리에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2015년, 유서 깊은 예술학교인 FTII의 새로운 총장으로 B급 배우에서 힌두근본주의자 정치인으로 변신한 가젠드라 차우한(Gajendra Chauhan)이 임명되었다.6)인도 정부는 이를 주도한 35명에게 다양한 혐의를 걸어 기소로 대응했다. 카파디아 감독도 이 35명 중 한 명이다. 2016년에 기소되었으니 선진국이었다면 1심은 물론 대법원판결까지 났을 시간이다. 하지만 인도의 사법 체계는 느리고 비효율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8년 전에 기소된 사건인데 아직도 3급심(Sessions Court)에 계류되어 정식 재판은 시작되지도 않은 채 시간만 흘러가고 있다.
2014년과 2019년의 총선에서 두 번 다 단독 과반을 달성하며 승승장구하던 집권당 BJP가 2024년 5월에 치러진 선거에서는 과반(272석)에 못 미치는 240석 수준의 의석을 확보하며 큰 망신을 당했다. 10년간 BJP 정권하에서 벌어진 무분별한 힌두근본주의 세력 확장과 개선되지 않는 취업상황이 원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카파디아에 대한 형사 고소 또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일어난 일이다. 하지만 이제 '모디 3.0' 정권은 이슬람교도, 그리고 불가촉천민(Dalit) 등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대변하는 소수정당과의 연정이 불가피해졌다. 과연 모디 3.0 정권은 칸 영화제 수상자인 감독과 끝까지 소송전을 벌일 것인가. 아니면 소송을 취하할 것인가. 영화계는 물론이고 언론계와 학계에도 깊게 드리워진 10여 년간의 우경화 추세는 과연 완화될 것인가? 관심 있게 지켜볼 만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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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일부 편집을 거쳐 딴지일보에도 게재되었습니다.
https://www.ddanzi.com/ddanziNews/812679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