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준비도 없이, 의사에게 불의의 '점검'을 당했다...
파리 지사에 근무하면서 파리 소재 American Hospital에서 건강검진을 받은 적이 있다. 수면유도제를 먹고 '닭꼬치처럼' 위아래로 위 내시경과 대장 내시경을 꽂아 넣는 요란한 한국식 건강검진은 아니었지만 나름 피도 뽑고 이런저런 검사도 진행되었다.
예정된 검사가 다 끝나고 생각했던 것보다 꽤 긴 문진이 시작되었다. 영어가 유창한 40대의 여의사와 이삼십 분 정도 면담을 했는데, 각종 가족력, 나 자신의 건강상태에 대한 자세한 질문과 대답이 오고 갔다. 거의 막바지에 '한밤중에 잠이 깨어서 화장실에 가는가?'라는 질문을 하길래, '얼마 전까지는 안 그랬는데, 최근부터 그렇다'라고 답변했다. (중년 남성분들은 대부분 이해하실 거다. 노화로 인한 '야간뇨' 현상 때문이다)
그러자, 의사가 대뜸 나에게 침대 앞으로 가서 옷을 벗고 뒤돌아 서란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미처 파악이 안 된 상태에서 쭈뼛쭈뼛 의사가 시키는 대로 옷을 벗고 침대에 손을 얹고 허리를 구부정하게 구부렸다. '혹시나'하는 상황이 '역시나' 발생했다. 의사가 위생장갑을 낀 손가락을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내 항문 속으로 집어넣더니 여기저기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분은 의사, 나는 환자였으니,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의학적’ 상황이었다. 하지만, 덩치가 나보다도 큰 40대 서양 여자에게 전혀 마음의 준비가 안된 상태로 ‘점검’을 당하다 보니 당황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와 의사는 자리에 돌아와 앉았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자니 너무나도 어색했다. 의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당황스럽고, 수치스럽고, 어색한 그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빨리 깨려고 떠듬떠듬 영어로 한 두 마디 말을 건넸다. '40대 중반인데 벌써 이런 증상이 나타나서 속상하다.' 뭐 이런 말을 했던 거 같다. 위생장갑을 '짝' 소리가 나도록 리드미컬하게 벗어던진 그 의사는 나에게는 눈길 한번 안 주고 컴퓨터 화면만 들여다보며 무심하게 답했다.
'어쩔 수 없죠. 우리는 모두 늙어요...'
그걸로 끝이었다.
빈 말이라도 한 두마디 위로의 말(‘야간뇨 현상 때문에 불편하시죠? 이해합니다.’ 등등)을 기대했는데, 립서비스는 없었다. 모든 인간은 노화한다는 생물학적 진실을 단순명료하게 나에게 상기시켜 주고는 끝이었다. ‘좀 더 늙으면 우리는 다 죽어요’라는 말 안 들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면담이 끝나고 나오자 건강검진을 먼저 마친 아내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점검’을 받았는지는 말 안 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내와 눈 마주치기가 부끄러워졌다. 난 아무 잘못한 것도 없고 부끄러워할 것도 없는데 말이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한참을 씁쓸하게 창밖만 바라봤다. 귓가에선 그 의사의 목소리가 무한 재생되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늙어요
We all age...
We all 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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