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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비와 호지의 아빠 May 23. 2021

우리는 모두 늙어요...

마음의 준비도 없이, 의사에게 불의의 '점검'을 당했다...

파리 지사에 근무하면서 파리 소재 American Hospital에서 건강검진을 받은 적이 있다. 수면유도제를 먹고 '닭꼬치처럼' 위아래로 위 내시경과 대장 내시경을 꽂아 넣는 요란한 한국식 건강검진은 아니었지만 나름 피도 뽑고 이런저런 검사도 진행되었다.


예정된 검사가 다 끝나고 생각했던 것보다 꽤 긴 문진이 시작되었다. 영어가 유창한 40대의 여의사와 이삼십 분 정도 면담을 했는데, 각종 가족력, 나 자신의 건강상태에 대한 자세한 질문과 대답이 오고 갔다. 거의 막바지에 '한밤중에 잠이 깨어서 화장실에 가는가?'라는 질문을 하길래, '얼마 전까지는 안 그랬는데, 최근부터 그렇다'라고 답변했다. (중년 남성분들은 대부분 이해하실 거다. 노화로 인한 '야간뇨' 현상 때문이다)


그러자, 의사가 대뜸 나에게 침대 앞으로 가서 옷을 벗고 뒤돌아 서란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미처 파악이 안 된 상태에서 쭈뼛쭈뼛 의사가 시키는 대로 옷을 벗고 침대에 손을 얹고 허리를 구부정하게 구부렸다. '혹시나'하는 상황이 '역시나' 발생했다. 의사가 위생장갑을 낀 손가락을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내  항문 속으로 집어넣더니 여기저기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분은 의사, 나는 환자였으니,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의학적’ 상황이었다. 하지만, 덩치가 나보다도 큰 40대 서양 여자에게 전혀 마음의 준비가 안된 상태로 ‘점검’을 당하다 보니 당황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와 의사는 자리에 돌아와 앉았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자니 너무나도 어색했다. 의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당황스럽고, 수치스럽고, 어색한 그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빨리 깨려고 떠듬떠듬 영어로 한 두 마디 말을 건넸다. '40대 중반인데 벌써 이런 증상이 나타나서 속상하다.' 뭐 이런 말을 했던 거 같다. 위생장갑을 '짝' 소리가 나도록 리드미컬하게 벗어던진 그 의사는 나에게는 눈길 한번 안 주고 컴퓨터 화면만 들여다보며 무심하게 답했다.


'어쩔 수 없죠. 우리는 모두 늙어요...'   


그걸로 끝이었다.


빈 말이라도 한 두마디 위로의 말(‘야간뇨 현상 때문에 불편하시죠? 이해합니다.’ 등등)을 기대했는데, 립서비스는 없었다. 모든 인간은 노화한다는 생물학적 진실을 단순명료하게 나에게 상기시켜 주고는 끝이었다. ‘좀 더 늙으면 우리는 다 죽어요’라는 말 안 들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면담이 끝나고 나오자 건강검진을 먼저 마친 아내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점검’을 받았는지는 말 안 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내와 눈 마주치기가 부끄러워졌다. 난 아무 잘못한 것도 없고 부끄러워할 것도 없는데 말이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한참을 씁쓸하게 창밖만 바라봤다. 귓가에선 그 의사의 목소리가 무한 재생되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늙어요

We all age...

We all 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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