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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비와 호지의 아빠 Jun 01. 2021

무언가를 '극혐'하는 우리들...

'극단적인 것'에 맞선 나의 소심한 반항...

'윤슬' 작가님이 브런치에 올리신 '아빠가 진라면 순한맛을 사버렸다 - 라면 심폐소생술 레시피'(https://brunch.co.kr/@yunseul125/19)라는 글을 얼마 전에 우연히 발견해 재미있게 읽었다. 사람들 사이의 기호 차이를 유쾌하게 묘사하면서, 혹시라도 진라면 순한맛을 구매하는 '실수'를 저지른 사람들에게 그 실수를 만회할 비법 레시피까지 제공하는 유쾌한 글이었다. 


매운맛을 그리 즐기지 않는 나와 우리 가족 입장에서는 진라면 순한맛이 최고의 라면이다. 하지만, 매운맛을 즐기는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에게는 진라면 순한맛이야말로, '왜 만드는지 이해할 수 없는 라면', '찬물에 한번 헹궈먹는 듯한 라면', '아이들을 위한 라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빙그레 웃음이 났다. 




내친김에 진라면 순한맛을 구글에서 한번 검색해 봤다. 찾다 보니 제일 먼저 떠오른 연관 검색어는 '진라면 순한맛 극혐'이다. 흠... 얼마나 싫으면 그냥 '싫다'도 아니고 극혐일까? 글도 좀 읽고 이미지도 좀 클릭해보았다. 윤슬 작가님의 글에서 보이던 재치와 웃음기는 발견할 수 없고, 대부분의 경우 진라면 순한맛 라면과 그걸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한 힐난과 조롱으로 가득 차 있다. 자신이 얼마나 진라면 순한맛을 '극도로 혐오'하는지를 마치 인증이라도 받아야겠다는 심산인 듯 (대부분의 경우 거슬린다 싶을 정도로) 격하게 표현한 댓글이나 이미지가 차고 넘친다. 


진라면 매운맛은 다 팔려서 사라지고 순한맛만 남은 마트 진열대 사진은 그나마 애교스러운 수준이다. 진라면 순한맛을 좋아하는 (원문에는 '순한맛을 빠는'이라고 표현되어 있었다) 사람들을 이해 못하겠다는 독설도 모자라 인신공격 수준의 글까지... 공개적인 자리에서 진라면 순한맛 좋아한다고 입을 떼었다가는 (살짝 과장을 보태자면) 돌 맞을 각오라도 해야 할 분위기이다. 물론, 진라면 순한맛이 '생각보다는 맛있다'라고 용감하게 커밍아웃하는 글들도 가끔 있었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무언가를 싫어하지 않고 '극혐'한다. 어떤 사람의 정치적, 종교적 신념과 같은 거창한 것뿐만 아니라 패션과 음식, 영화와 같은 단순한 기호도 내 입맛에 맞지 않으면 '극혐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고 글로 옮긴다. 단순히 싫어한다고 해서는 더 이상 '쿨'하고 멋져 보이지 않기 때문인가? 아니면 무슨 말을 하건 무조건 자극적으로 해야 눈길을 끌기 때문인가? 만약 그렇다면 '극호'라는 말도 유행해야 할 텐데 '극호'라는 말은 유행하지 않는 걸 보니, 자극적으로 말하더라도 부정적인 표현이어야만 더 눈길을 끄는가 보다.


하긴, 나와 취향이 같고, 생각의 지향점이 같은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쓰는 것은 솔직히 지루하다. 나와 다른 사람, 내가 잘 모르는 취향,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와 익숙하지 않은 가치관에 대해서 마음껏 극혐하고, 조롱하고, 깎아내리는 게 훨씬 더 쉽고, 재미있다. 더군다나 각종 매체에서 나처럼 무언가를 극혐하는 우군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면 더욱더 거리낄 것이 없다. 무지와 몰이해가 군중심리라는 힘을 만나면 무서울 것이 없어진다. 나의 혐오감이 나 자신의 온전한 감정인지 그런 매체들이 나에게 심어준 감정인지조차 고민해볼 필요도 없다. 결국, '극혐' 당하는 사람들이 때때로 머쓱함, 당황스러움, 심한 경우에는 두려움과 공포심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관심도 두지 않는다.  


오직 '매운맛'만이 라면의 올바른 맛이고, 그 이외의 것들은 모두 '극혐'할 대상이라고 말하는 글과 이미지가 횡행하는 세상에서,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 전체주의의 망령을 슬쩍 엿보았다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 극단적인 것이 극단적이지 않은 것을 압도하는 세상, 극단적이지 않은 것이 '극혐' 당하는 이 사회에 아주 소심하게나마 나만의 방식으로 저항에 보련다. 앞으로도 꾸준히 진라면 순한맛을 내 돈 내고 사 먹으면서 말이다. 내 인생에서 내.돈.내.산 할게 하나 더 생겼다. 


'오뚜기 사장님!! 저는 진라면 순한맛 '극호'입니다. 계속 만들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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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주)오뚜기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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