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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수빈 Your Celine Sep 26. 2020

아빠가 진라면 순한 맛을 사버렸다.

라면 심폐소생술 레시피

"언니! 아빠가 큰 실수를 했어! 이거 봤어?"

도대체 무슨 일을 했길래 '실수'라는 단어가 나왔나 싶었는데.

아빠가 진라면 순한 맛을 사버렸다. 적어도 우리 집에서는 실수가 맞았다.


  자주 손을 대지 않지만 없으면 안 되는 것들이 몇 개 있다. 투게더 아이스크림, 대용량 과자 그리고 라면이다. 라면은 정말이지 있을 땐 무심하고 없을 땐 초조하다. 유난히 배가 고픈 날 집에 들어와 전기밥솥을 열면 마침 밥이 없다. 그럴 때 라면은 기분 좋은 구호식품이 되어준다. 밥을 해 먹기는 거창하고, 군것질을 하기에는 성에 차지 않을 때 딱 적당하다.


  그래서 라면은 가끔씩 대용량으로 택배를 시킨다. 주문은 인터넷 쇼핑 마니아인 아빠의 몫이다. "딸, 이번엔 라면 뭐 시킬까?"라고 물어보시면 늘 비슷한 대답을 한다. 나는 진라면(매운맛), 동생은 불닭볶음면이다. 모든 요리에 청양고추가 깨처럼 마무리되어야 하는 아빠 밑에서 자란 우리들은 매운 음식을 잘 먹는다. 음식을 완성하고 엄마가 뒤돌아선 사이에 재빨리 청양고추를 썰어 넣는 아빠였다. 엄마도 자연스레 그런 입맛이 되었다. 그러니 진라면 매운맛은 당연한 일.


  쇼핑커머스 사이트에서 여러 라면 종류를 묶어서 배송해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큰 박스에 다양한 라면들이 배송된다. 그날도 큰 박스 하나가 배달되었다. 웬 파란 포장지를 보고는 동생이 놀란 눈치였다. '파란색... 진라면 순한 맛..?' 해가 저물고 아빠가 집에 오자마자 사건의 전말을 캐묻기 시작했다. 어떻게 순한 맛을! 그것도 세 봉지나 시킬 수 있는 건지 말이다. 매운맛을 사랑하는 아빠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인 건 마찬가지였다. 진라면이 순한 맛과 매운맛으로 나눠져 있다는 사실을 모르셨던 게 아닐까. 아무튼 아빠의 실수로 마무리되었다.


  동생과 처음으로 진라면 순한 맛을 끓여보았다. 그래도 맛이 있지 않을까. 진라면인데!

아니었다.

이 맹숭맹숭하고 뭔가 강렬한 맛이 빠진 이 느낌은 뭘까. 어렸을 적, 그러니까 김치도 매워서 못 먹던 시절에 찬물을 접시에 떠놓고 한번 헹궈먹었던 그 맛이었다. 한입 먹고는 우리는 같은 표정을 지었다.

"순한 맛을 왜 만들지? 자극적인 맛을 만들어도 모자란데?!" 아이들을 위한 라면인가 보다.라고 결론지었다.


  동생은 음식에 조금 일가견이 있다. 어렸을 때 내가 실험정신으로 해줬던 요리들이 끔찍이 싫었단다. 그 충격 때문인지 맛없는 건 못 보는 성격이다. 그동안 내가 본 바로는, 소소한 요리들이 꽤나 맛있었다. 문득 라면이 먹고 싶어 동생에게 "라면 어때?"라고 묻자 본인이 엄청난 레시피를 발견했다며 자랑했다. 백종원 아저씨 레시피인데 순한 맛을 맛있게 먹었다면서. 못 믿는 눈치를 보이자 곧장 라면을 끓여줬다. 웬걸. 정말 맛있었다. 라볶이 비슷한 맛인데... 정확히는 라볶이와 라면 그 중간인 듯하다.


레시피는 이렇다. 귀찮아하는 동생을 불러 받아 적어 보았다.

재료: 진라면 순한 맛 1개, 고추장 1스푼, 설탕 1스푼, 파 적당히 기호에 맞춰서(많이 넣으면 맛있음), 물은 종이컵 1컵 반, 라면수프 반만, 넣어서 맛있겠다 싶은걸 넣으면 맛있지(?)

순서는 간단하다. 물이 끓으면 나머지 재료들을 넣고 똑같이 끓이면 된다. 자극적이지 않은 진라면 순한 맛과 달큰한 고추장의 맛이 조화롭다.


  동생과 라면을 끓여먹을 때면, 있는 그대로를 먹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꼭 숙주, 파, 마늘, 깻잎 등 채소를 추가하거나 카레가 있으면 카레라면, 크림소스가 있으면 까르보라면을 해 먹곤 한다. 그런 라면이 메인이 아닌 ‘재료’가 되는 음식이라면 너무 강한 맛보다는 이름처럼 순한 맛이 오히려 맛을 다채롭게 만들어주지 않을까. 자극적인 맛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다른 재료 본연의 맛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너무 강한 것들은 때론 사소한 미를 놓치게 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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