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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수빈 Your Celine Oct 09. 2020

여름 정리하기

이전 계절을 제대로 정리해야 다음 계절을 오롯이 느껴볼 수 있다

바닥에 으깨진 은행들을 보고 여름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헌 옷 수거함 앞에 수북이 쌓인 옷들을 보고 여름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날이 추워지면 입어야지 했던 니트를 입었는데도 온기가 부족한걸 보니 여름을 정리해야겠다.


  계절의 냄새가 있다. 그 냄새는 이전의 계절이 자리를 물려줄 즈음, 예측하지 못한 순간 나를 덮친다. 일 년은 열두 달, 한 계절은 세 달. 왠지 강렬한 두 계절이 나머지를 차지하는 흐름이지만 아직은 그 각각의 냄새가 뚜렷하다. 계절의 냄새는 처음 문을 열고 바깥의 공기를 콧속으로 들이마실 때 선명하다. 그렇게 일 년에 딱 네 번 느낄 수 있는 설레는 일이다. 아쉽게 헤어졌던 친구가 돌아온 기분이다.


  현관에 마스크 박스를 두었다. 문을 열기 , 신발을 신는 것처럼 마스크를 쓴다. 그렇게 봄과 여름을 보냈다. 냄새로 계절의 변화를 눈치채는 일이 없었다. 마스크는 후각이 많은 일을 하지 않게 했다.  근처 낮은 산을 걷다 멈춰 섰다.  속에 혼자 뿐인데  상쾌하지가 않지. , 마스크. 이제는 이질감 대신 착용감이 익숙하다. 왼쪽 귀에 걸쳤던 마스크 끈을 풀었다.  숨을 들이쉬자  안이 시큰해질 정도의 차가운 가을 냄새가 가득했다.


'가을이구나.'


  계절의 이름이 바뀌는 타이밍은 누군가 정해주지 않는다. 좋아하는 날씨가 다가온다던가, 먹고 싶은 과일이 열린다면 다음 계절을 한걸음 앞에서 맞이할지도 모른다. 혹은 유독 그 계절에서만 존재해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이 있었다면 그 계절을 빨리 정리해버리고 싶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이번 여름은 봄의 연장선이었다. 낮이 조금 더 길었고, 밤이 조금 짧았고, 가끔 손으로 부채질을 하곤 했다. 여름을 알려준 건 시원한 수박주스였다.


  여름을 정리하자고 마음먹었다. 카페에서 이미 수박주스 메뉴가 사라진 걸 보니 정리하기에 늦은 감이 있다. 먼저 여름옷을 정리했다. 사실, 정리할 게 많지 않았다. 이번 여름은 새로운 것들이 적었다. 그리고 달력을 넘겼다. 남은 종이가 2장이라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 이제 여름이 끝났을 뿐인데 이러기야? 그래 어서 가을을 맞이해야지. 마지막으로 봄과 함께 시작했던 다이어리의 마지막 장을 펼쳤다. 마지막 장은 늘 버킷리스트가 있어야 한다. 그래도 소소하게 많은 것들을 했구나라는 생각과 남은 계절 동안 할 수 있는 것들을 계산해본다. 여름을 보내는 일은 겸손해야 한다.


  계절의 냄새를 늦게 알아차린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전 계절을 제대로 정리해야 다음 계절을 오롯이 느껴볼 수 있다. 올해의 가을은 왠지 더 진한 고동색이다. 활기찬 나뭇잎이 묵묵히 물들듯 차분하고 절제하는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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