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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평생의 수고가 헛되기를 바랍니다.

유퀴즈 온더 블록에서 종교적 구도의 길을 발견했다...

며칠 전에 경북 봉화에 소재하는 '시드 볼트(Seed Vault)'에 근무하시는 분이 ‘유퀴즈 온더 블록’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신 것을 봤다. 그 분은 시종일관 차분하고 조리 있게 지금과 같은 기후위기의 시대에 야생식물의 종자를 영구 보관하는 자신들의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귀에 쏙쏙 들어오도록 설명해주셨다. 인터뷰 말미에 피디(아니면 작가?)가 그분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만약 시드 볼트의 종자가 꽃을 피우는 날이 온다면?'


그러자, 그때까지 친절했던 그분의 얼굴 표정이 사뭇 비장하게 바뀌더니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한 어조로 답변했다.


'저는 그런 상상을 하지 않습니다. (시드 볼트에 보관된 종자가 필요해진다는 것은) 곧 그 종자가 지구 상에서 멸종되어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저희들이 시드 볼트에서 보관한 종자는 영원히 나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분은 '영원히'라는 단어를 매!우! 힘주어 말씀하셨다. 시드 볼트에 보관 중인 종자들은 '영원히 나오지 않고 여전히 시드 볼트에 보관 중이기를 희망한다'고 말이다.




이 세상의 거의 모든 직업인들은 자신의 직업이 쓸모 있기를 희망한다. 라면을 만들었으면 많이 팔리기를 바라고, 영화를 만들었다면 대박 히트를 바라는게 인지상정이다. 쓸모 있는 것에 더해서 더 많이 알려질 수 있다면 금상첨화리라. 많은 사람들이 유튜브나 각종 인터넷 매체에 이리도 목매는 것 또한 자기 자신이 하는 일이 더 많이 알려지고 더 널리 쓰이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이 출연자분은 일 년 내내 수많은 씨앗 종자들을 자기 자식들인 양 애지중지 보살피는 것을 자신의 업으로 삼으신 분이었다. 그분이 하신 대답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평생 동안 저희들은 이 종자들을 보관하지만, 저희들의 일이 종국적으로는 쓸모없는 헛수고이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에 다름없었다.


반쯤 잠든 상태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나는 그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다. 경상북도에 있는 산골에서, 그것도 지하 46미터에 위치한 직장에서 평생을 보내는 것도 쉽사리 상상하기 어려운데,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평생의 업이 결국 쓸모없는 일이기를 바란다니...


'평생을 바친 자신의 직업이 헛수고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과연 이 세상이 얼마나 될까?'




내 나름대로 힘겨운 인도 생활을 견디며 나의 인도 생활이 우리 회사와 인도 주민들에게 도움이 되리라 믿으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답답하고 불합리한 현지 규정이나 절차로 내 일이 진척되지 않으면서 때때로 짜증을 내곤 했었다. 현지 사정도 잘 몰라주는 본점의 독촉을 받으면서 아무리 마음씨와 말뽄새를 조심하려 해도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하지만, 문자 그대로 '인류의 미래를 위해' 일하는 분이 담담하지만 단호하게 자신들의 일이 쓸모없기를 바란다는 말씀을 하는 것을 듣고 나니, 나의 짜증과 투정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었는지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한편으로는, 평생을 바친 자신의 소명이 궁극에는 무용(無用)에 이르기를 바라는 그분의 직장생활이 종교적 구도(求道)의 길과 조금은 닮아 있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자신의 힘을 다하여 궁극을 지향하지만, 결국에는 아무 ‘쓸모 없음’에 도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종교가 아니고 무엇일까?


텔레비전을 끄면서, 그런 분들이 조금 더 많아질수록 이 세상이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기왕이면, 열심히 보살핀 종자들이 쓸모없는 세상뿐만 아니라, 꾸준히 연마한 인명구조 기술이 쓸모없는 세상, 소방기술이 불필요해져서 소방관들이 어리둥절해지는 세상...


그런 세상이 오면 참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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