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행 탑승 게이트에서 장모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한 달간의 본국 휴가를 마친 후, 작별인사를 드리기 위해 인도행 비행기 탑승구 앞에서 장모님께 전화를 드렸다. 나와 통화하실 때는 씩씩한 목소리로 통화하시는 듯했다. 하지만, 두 외손녀의 작별 인사를 받고서는 울먹거리시더니 마지막으로 아내와 통화하실 때는 핸드폰 밖으로도 장모님의 울음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마음 여리신 장모님을 오랫동안 보아 온 쿨하디 쿨한 성격의 내 아내는 별일 아니라는 듯 한편으로는 장모님을 달래가며, 한편으로는 살짝 타박해가며 통화를 이어나갔다.
'아유. 엄마도 참. 우리가 뭐 인도에 죽으러 가요?
거기도 다 사람 사는데야. 여태까지 일 년 반 잘 살았잖아...
우리 걱정 말고 엄마랑 아빠나 건강히 계세요. 조만간 또 휴가 나올게요.'
아내가 건넨 핸드폰을 받아 들었는데, 마음이 무거워 한참 동안 손에서 핸드폰을 뗄 수가 없었다.
아내와 결혼을 약속하고 처음 예비 장인, 장모님을 뵈러 간 날, 어색한 긴장 속에서 어찌 행동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런 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던 장모님의 첫마디...
'애들 아빠를 닮아서 너무 마음에 든다'
작달막한 키, 약간 통통한 체형, 그리고 조금 성긴 머리숱까지... 그러고 보니, 나는 장인어른의 그다지 빼어지나 않은(?) 외모를 제법 많이 빼닮았다. 장인어른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시던 장모님의 첫마디에 나는 완전히 무장해제되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아, 나는 반드시 이 집 사위가 되어야겠다.'
척하면 삼천리요 쿵하면 호박이라 하지 않던가. 장모님의 그 한마디 속에, 화목한 집안 분위기가 다 담겨 있었다. 장인어른이 얼마나 집안 식구들을 사랑해왔고, 식구들을 위해 헌신해왔는지, 장모님이 그런 장인어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3녀 1남 자식들이 자신의 부모를 얼마나 사랑하고 존경하며 우애 있게 살아왔는지... 이 모든 것이 다 녹아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집과는 정반대였다. 돈 많은 집에서 형제가 다툰다면 막장 드라마의 소재라도 되겠지만, 가난한 집에서 돈을 두고 형제가 다투면 그보다 추잡한 것도 없다. 10살 어린 막내 동생(필자에게는 막내 숙부)은 코딱지 만한 재산을 앞에 두고 자산의 큰형(필자의 아버지), 심지어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필자의 할아버지)에게도 각종 네발 달린 짐승들을 소환해가며 욕지거리를 해댔다. 장남인 나의 아버지는 자신마저 평정심을 잃으면 집안이 콩가루가 될까 봐 버르장머리 없는 막내 동생의 욕받이 노릇을 묵묵히 참으셨다.
할아버지 장례를 치르던 날...
아버지 3형제 중에 가장 좋은 직장에 가장 돈도 많은 막내 숙부는 자기 아버지가 죽어 묻히는 그날까지도 무엇이 그리도 마음에 안 들었는지 자신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저주를 퍼부을 기세였다. 그동안 쏟아낸 수많은 욕지거리로도 모자랐는지 묫자리에서도 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인부들이 쓸 삽과 곡괭이를 나눠 들고 산을 오르던 나는 그 순간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살기 가득한 얼굴을 목격한 고모님들이 다급하게 삽자루를 거꾸로 쥐어든 내 손을 붙잡은 덕분에 신문 사회면을 장식할뻔한 끔찍한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쯤 되니 형제나 친척간의 우애는 고사하고 서로 안보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로운, 원수보다 더 나쁜 사이가 되어버렸다. 자연스럽게 오랫동안 왕래를 끊고 지내고 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도시 고등학교로 진학하기 위해 시골집을 떠날 때 나는 지긋지긋한 아버지 형제들의 다툼, 악다구니, 비명과 욕설을 떠난다는 생각에 너무나도 홀가분했었다. 집은 항상 긴장감이 가득한 곳, 때때로 심한 다툼도 있는 곳, 누군가는 욕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말리고, 그리고 나이 어린 내 여동생은 너무 무서워 울지도 못하고 사시나무처럼 부들부들 떨며 서 있던 곳이었으니까.
그런 나와 달리, 아내에게 집은 행복하고 따뜻한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시집가기 직전까지 3녀 1남이 25평 아파트에서 복닥거리던 아내의 인생, 그리고, 그 가족들을 보살피시던 장인어른과 장모님의 사랑과 헌신은 나에게는 놀랍고 낯선 것이었다. 내가 결혼한 후에도 한 달에도 서너 번씩 저녁자리에 모인 아내의 형제자매들 그리고 사위들은 몇 시간이고 웃고 떠들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술 한잔, 화투 한 장 돌지 않는데도 명절마다 행복한 수다 소리가 좁은 거실을 가득 채우곤 했었다.
'아... 가족이 모이는데도 싸우지 않는구나.
심지어 즐거울 수도 있구나'
비린 음식을 좋아하시는 장모님은 손도 크셨다. 나를 포함해서 사위 세명 모두 비린 음식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였으니 모일 때마다 잔치상이었다. 밥상에는 미역국, 간장 게장, 대하 새우, 조기 구이, 소라나 조개, 그리고 가끔 대게가 푸짐하게 올라왔다. 맛있는 반찬을 정신없이 먹다 보면 장모님이 퍼주시는 그 고봉밥은 순식간에 사라지곤 했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순간 가장 행복해하셨던 분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장모님이었다.
하지만, 툭하면 해외근무 때문에 한국을 떠나는 둘째 사위(필자)도 모자라 이제는 셋째 사위(필자의 손아래 동서)마저 말레이시아 근무가 확정되었고, 7월이면 한국을 떠난다. 장가 안 간 노총각 막내아들(필자의 하나뿐인 처남)은 자기 친구들과의 저녁이 우선일 테니, 이제 큰 밥상 펼칠 일도 없이 장인어른과 장모님만의 쓸쓸한 겸상이 될 것이다. 장모님의 상실감이 얼마나 클지 충분히 짐작이 된다.
부쩍 외로워지실 장모님께 안부 전화라도 자주 드려야겠다. 장모님을 닮지 않아 쿨하다 못해 무뚝뚝하기까지 한 아내가 장모님께 전화 자주 할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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