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밥에 점점 익숙해진다는 것에 대하여

인도에서의 혼밥이 나에게 준 선물 하나...

3년간의 프랑스 지사 근무를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한 2017년 1월...


본사로 출근하기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점심을 먹기 위해 사무실 동료 몇 명과 함께 회사 근처 식당에 들어섰다. 식당 안을 둘러보는데 우리 회사 고참 부장 네 명이 한 테이블에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귀국하고 처음 얼굴 보는 사람도 있고 해서 한두 마디 인사를 나누고 내 테이블로 돌아왔는데, 자꾸만 그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눈길이 갔다.


양복을 차려입은 늙수그레한 오십 대 아저씨 네 명이서 작은 테이블(여의도에서 고급식당이 아닌 직장인들이 주로 다니는 식당 한 군데라도 가본 사람은 그런 식당들이 얼마나 협소한지 알 거다)에 앉아 팔꿈치를 부딪치며 말없이 칼국수를 먹고 있는 생경한 모습... 그러다 불현듯 깨달았다. 그들 네 명이 같은 해에 회사에 입사한 입사동기라는 걸 말이다... '흠... 회사 생활을 20년도 넘게 한 입사동기들끼리 딱히 죽고 못 살 정도로 안부가 궁금해서 만났을 것 같지는 않은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조금은 재미있으면서도 조금은 서글펐다.


점심시간만 되면 부장만 빼놓고 자기들끼리 점심 먹으러 나가는 젊은 직원들 때문에 번번이 사무실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지던 고참 부장들... 그나마 가장 속 터놓기 편한 입사동기들과의 카톡방에서 누군가가 이야기를 꺼내자, 여기저기에서 비슷한 경험담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자기만 '혼자 덩그러니 남겨지기'를 당한 게 아니고 다른 부장들도 쭈욱 그렇게 혼자 남겨진다는 것을 카톡방에 있던 부장들이 모두 알게 된 것이다.ㅠㅠ


기분 나쁜 일도 나 혼자만 당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되는 법. 누군가의 주도로 '그럼, 매일 11:50분까지 점심 약속 못 만든 사람끼리 모여서 같이 점심 먹으러 가자'라고 의기투합이 되었다는 거다. 그리하여, 하루는 칼국수집, 하루는 순댓국집, 하루는 갈비탕집... 이렇게 젊은 직원들 눈치 안 보면서 오십 대 아재들이 좋아할 만한 국물 뜨끈한 메뉴들을 돌아가면서 원 없이 먹는 '점심 번개 모임'이 만들어졌다는 거였다. 자기들만 남기고 떠나버린 젊은 직원들에게 '흥, 칫, 뿡... 너희들 없어도 우리끼리 점심 잘 먹는다'라고 시위라도 하듯이 말이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타사에서 우리 회사 임원급으로 새로 영입되어 오신 분과 점심 식사자리가 있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던 중에 젊은 직원과의 세대차이 이야기가 나왔다. 그 임원은 자기가 젊은 직원들의 생각과 행동을 많이 이해하고 존중한다는 것을 대화 내내 꽤나 힘주어서 강조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누군가의 입에서 '요새는 같은 팀에 있는 직원들과 점심 먹으려 해도 며칠 전부터 약속을 미리 잡아야 한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 임원은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거죠'라는 말과 함께, '제가 다니던 회사에서는 자기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으면, 그걸 보게 되는 젊은 직원들이 부담을 느낄까 봐 아예 점심시간 시작 5분 전에 조용히 사무실을 빠져나와서 혼자 밥 먹으러 가는 임원들도 있었어요.. 젊은 직원들이 그런 분들을 '감각 있으신 분' 내지는 '꼰대 답지 않은 분'이라고 좋아하는 분위기였어요..'라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직도 젊은 직원과의 점심식사를 그리워하고 있던 몇몇 고참 부장과 팀장들은 순식간에 머쓱한 구시대의 인물이 되어버렸다.




이제, 우리 세대는 젊은 직원들의 존경과 칭송을 받기 위해서는 알아서 점심시간에 알아서 사라져 줘야만 하는 신세가 되었다. 저녁 회식 때 카드만 주고 사라져 주기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이제는 점심때에도 사라져 야 쿨한 선배가 된단다. 우리 세대가 신입사원이었을 때만 해도 일하는 시간도 모자라 점심시간, 저녁식사시간에도 선배 직원들과 같은 공간에서 부대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밥때가 되기 전에 알아서 식당 예약해 놓고, 먼저 식당에 뛰어가서 자리를 잡은 후, 물컵이랑 숟가락과 젓가락을 선배들 앉을 자리에 먼저 가지런하게 정렬해놓지 않으면 '눈치 없는 부하직원'이라는 지청구를 받던 시절이었다.


젊었을 때 우리가 선배들을 대우했던 것을 회상하면서 지금의 젊은 직원들을 바라볼 때마다 '본전 생각이 안 난다'면 그건 솔직히 거짓말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세상은 빠르게 바뀌었고, '그렇지 않아도 꼴 보기 싫은 팀장, 과장 얼굴을 점심시간에도 봐야 하나요? 나 혼자서 내 시간을 보람 있게 보낼래요'라는 젊은 직원들의 목소리는 이제 '국룰'이 되었다. 업무 시간도 모자라 밥 먹는 시간까지 미주알고주알 업무 관련 잔소리에, 원하지도 않는 인생 상담에, 꼬치꼬치 사생활 캐묻는 이야기에, 나랑 맞지도 않는 정치 성향까지... 들려줄 필요도 없어졌고, 들어줄 의무도 없어졌다.




2020년 초에 인도에 도착한 지 몇 주 만에 코로나가 급격히 확산되었다. 그 덕분에, 한국인 직원과 인도 직원이 모여 앉아 도시락을 먹으며 콩글리시와 인도식 영어가 잠깐 오가다가 이내 긴 침묵이 계속되는 어색한 점심 식사는 중단되었다. 이후로는 최소 인원만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대부분 재택근무를 하다 보니 점심은 도시락 혼밥이 당연해졌다. 아무리 간단한 점심 도시락이라지만 엄연히 한 끼의 식사다. 평일 저녁과 주말에 설거지는 내가 하겠다고 나서고 있지만, 일주일에 닷새 꼬박 아침마다 도시락을 챙겨야 하는 아내에게 한없이 미안한 형국이 되었다.


그나마 인도에서의 혼밥이 나에게 준 선물(?)이 한 개 있는 것 같다. 앞으로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면 너무나도 당연히 나에게 찾아올 '덩그러니 혼자 남겨지기'에 맞닥뜨리더라도, 크게 당황하지 않고 의연하게 혼밥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멋진 선배'의 분위기를 사방에 뿜뿜하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다. ㅠㅠ


오늘도 이렇게 젊은 세대와의 공존 방법에 조금 더 익숙해진 거는 분명 좋은 일인 거 같은데... 마음 한구석이 조금 섭섭한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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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oto by Jinomono Media on Unsplas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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