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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도 Jul 19. 2023

2023년 6월 발리 여행-1

좋은 기억은 추억, 나쁜 기억은 또한 경험이 된다.

4월 즈음부터 여름휴가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수많은 선택지 중 어느 날 갑자기 '발리? 발리!'라고 결정 내렸다. 아마도 인스타그램에서 봐온 멋진 사진들이 내 무의식에 큰 영향을 미쳤을 터.


목적지만 정한 채로, 무작정 스카이스캐너를 켜서 발리로 가는 호찌민 경유 최저가 항공권을 예약했다. 들뜬 마음에 서둘러 결제를 했는데, 아차! 나야 휴가 신청서만 올리면 되는 직장인이다. 하지만 짝꿍은 직원과 스케줄을 조율한 후에 휴가를 픽스해야 했는데, 그걸 간과했다. 하지만 최저가 항공권은 언제나 취소/환불 불가이고 가슴은 철렁했다.


부랴부랴 소중한 직원님께 연락을 드려보았는데, 돌아온 답은 두리뭉실. 확답을 들으려면 3~4일 정도를 기다려야만 했다. 예상치 못한 난관이었기에, 주말 내내 마음속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말이 씨가 된다.'라고 믿는 사람이기에 '그분이 안된다고 하면 어떡해?!?!'라고 소리 내어 묻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참느라 두 배는 더 힘들었다.


그렇게 인고의 시간이 지나, 다행히도 직원님께서 오케이 하셨고 우리는 본격적으로 여행을 준비하게 되었다. 노션에 항공권 시간, 호텔 정보, 하고 싶은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나는 극강의 J이다.) 입버릇처럼 "발리 빨리 가고 싶다!"를 외치곤 했다. 일단 첫 번째로 정했던 건, 어느 지역을 갈지였다. 발리엔 수많은 지역들이 있는데 일단 바다가 가까운 사누르에서 첫 3박, 그리고 정글숲이 우거진 우붓에서 3박을 하기로 했다.  


노션 메인 페이지. 여행을 다녀온 지금도 발리를 생각하면 두근두근하다.


그렇게 순탄하게 여행을 준비하던 중, 비엣젯 항공에 대한 블로그 글들을 보다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안 좋은 이야기들이 너무 많았다. 경험자분들에 따르면 (1) 가방 무게가 7kg가 넘으면 추가 요금을 내야 하는데, 이걸 홈페이지에서 미리 내면 반 값이다. (2) 가방 무게는 직원마다 융통성 있게 넘어가주기도 하고, 빡빡하게 잡기도 한다. (3) 심지어 체크인 때는 아무 말 없다가, 비행기 타기 직전에 잡혀서 추가요금을 내게 했다 등등... 우리나라 블로그는 참 친절하고 정보가 넘쳐난다.


나는 왜 주식을 살 땐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큰돈을 팡팡 쓰면서(그렇게 강제 장기투자를 하게 된 종목들이 꽤 있다.), 이런 오천 원, 만 원짜리 일에는 지갑을 부여잡게 되는지 모르겠다. 많이 내봤자 5만 원일 텐데... 미리 할까 말까 고민이 되었다. 내가 생각해도 쿨 해 보이지 않는 고민 끝에, 쭈뼛거리며 짝꿍에게 물었다. "이렇다는데, 어떡하지?" 그리고 돌아오는 명쾌한 대답. "가서 추가 요금 내야 하면 내지 뭐? 그리고 난 어차피 짐 별로 없으니까 필요하면 내 가방에 옮겨 넣어." 순식간에 마음이 개운해졌다.

결론적으로는 추가 요금은 웬 말? 내 가방은 10kg가 넘었는데도 노 프라블럼이었다. 게다가 비엣젯은 항공기 지연으로 악명 높은데, 우리가 오며 가며 탄 비행기는 지연이 전혀 없었다. 다음에도 저렴한 가격의 비엣젯 티켓이 보인다면, 재구매 의사 1000%!


호찌민에서의 경유 시간이 대략 7시간 정도 됐기에 난 그동안 공항 근처 5만 원대 호텔을 잡아 잠시 나갔다 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짝꿍이 웬일로 공항에서 노숙(?)을 해보고 싶단 의견을 냈다. 나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승낙을 했던 걸 보면, 썩 싫진 않았나 보다. 어차피 좋은 기억은 추억, 나쁜 기억은 또한 경험이 된다. 그리고 이 '노숙 경험'은 우리에게 재밌었던 추억이 되었다.

공항 화장실에선 요상한 계피냄새가 진동을 해서, 그 계피향만으로도 누가 화장실에 다녀왔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리의 충전기 코드 자리를 빼앗으려던 베트남 아주머니에게 지지 않고 맞섰던 기억도 재미있다(다른 자리를 찾아드렸다.). 공항 안에 있는 쌀국숫집에서 인스턴트의 맛도 느꼈고, 달고 쓴 카페 쓰어다를 한 모금 마시고 인상을 잔뜩 찌푸리기도 했다. 그리고도 배가 고파 한국에서 사간 비상용 과자들을 동 낼 땐 소풍온 기분도 들었다. 단체로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과자를 나눠먹던 귀여운 네 가족, 예쁘게 동이 트던 하늘은 그 나라 특유의 분위기와 어우러져 따뜻한 기억으로 남았다. 물론 계피향과 함께.


그렇게 다시 발리로 가는 비행기. 키가 작은 나에겐 비엣젯의 좌석도 그다지 좁진 않았다. 사실 비행기 자체는 정말 문제가 없었다. 깨끗했고, 쾌적했다. 반전으로 문제는 이웃 승객들이었다. 뒷 좌석에 앉은 커플은 둘 다 키가 180cm가 넘는듯해 보였고, 내내 우리 등받이를 드럼 연습하는 것 마냥 두들겼다. 하지만 그들의 길게 뻗은 다리를 보며, 지금 이 순간 가장 힘든 건 그들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화조차 나지 않았다. 그런데 웬 걸, 갑자기 앞 좌석에 앉은 아주머니께서 멀미가 나신 건지 좌석에 앉은 채로 속을 조용히(?) 비우시기 시작했다. 눈이 마주친 우리는 웃기 시작했다. 그냥 그 모든 순간이 황당했고, 거짓말 같았다. 그래, 이것도 추억이다.


그렇게 도착한 발리 공항은 매우 혼잡했다. 도착 비자는 말 그대로 요금만 지불하면 5초 만에 발급이 되고, 줄도 길지 않다. (한국에서 미리 전자비자를 받아갈 필요가 전혀 없다.) 그런데 입국 심사 줄이 너무나 길어서 심사까지 50분가량을 서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미리 예약한 공항-호텔 픽업 기사님은 단 2시간만 기다려준다며 문자로 자꾸 나를 재촉했다. 지금 가장 빨리 나가고 싶은 건 나라고요!


그렇게 심사를 통과하고 사누르로 가는 택시 안. 긴 경유로 인한 피로도 사라지고, 들뜸만 남았다. 발리 여행이 기대됐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우리가 예약했던 사누르의 풀빌라였는데, 그 풀빌라는 가히 우리가 한 최고의 결정이었다. 여행을 다녀온 지 거의 한 달이 된 지금도 발리보다 그 풀빌라에 또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다.


사진엔 담기지 않는 그곳의 풍경, 분위기와 향기가 지금도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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