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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do Lee Aug 12. 2019

일본식 미국 요리 | 미국식 일본요리

American-Japanese Cuisine' TEPPANYAKI


미국에서 '일본요리'로 여겨지는 것 중 데판야키라는 것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보통은 데판야키로 불렀다. 몇 년 전까지 도산대로에는 그 데판야키의 글로벌 프랜차이즈 중 가장 성공했던(?) 베니하나가 있었다. 그보다 좀 더 옛날엔 그것을 더 간소화시킨 '철판볶음밥'이라는 형태가 90년대에 잠시 흥했다. 지금은 아마 명목을 간신히 잇는 정도로 남아있는 정도일 것이다.


나는 일본에는 거의 가 보지 않았기 때문에, 데판야키가 일본에서 정작 '정통 일본식 요리'로 인정받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오코노미야키나 몬쟈처럼 철판을 이용하는 요리들이 그들의 일반적인 삶에 녹아들어 있다는 정도는 어렴풋이 다른 문화매체를 통해 알게 되었다.


오코노미야키와 데판야키의 공통점은 큰 철판 위를 요리의 주요 도구로 사용한다는 점에 있고, 차이점은 그 철판 위에서 무엇을 만드느냐와 누가 만드느냐 (직접, 혹은 요리사가) 정도라 할 수 있는 것 같다. 오코노미야키는 우리나라의 전 비슷한 것을, 데판야키는 서양식 재료(?)들을 stir fry 형식으로 굽는 것. 여기에서 차이가 벌어진다. 오코노미야키와 데판야키의 결정적 차이는 반죽으로 1차 가공을 한 것을 철판에 굽는 것과, 날 것 그대로를 철판 위에서 구워내는 것에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그저 세세한 디테일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오코노미야키는 '매우 일본적'인 것으로 느껴지고, 데판야키는 어딘가 모르게 '글로벌화한 일 본 것 비스무리한 것'으로 느껴진다는 점이다. 구워내는 재료에 손이 조금 더 가고 덜 가고의 미세한 차이와, 거대한 철판을 사용한다는 공통분모를 가진 요리법에, 우리가(아니면 나만) 그런 미묘한 뉘앙스의 다름을 느끼는 것은 재미있다. 


미국 테네시 주 | Bud Light 네온, 일본 광고 포스터, 라틴계 손님, 아시안-아메리칸 요리사 그리고 나
미국 동부 한복판에서 이렇게 마구잡이로 섞인 문화를 접하는 것만큼 흥미로운 일이 또 있을까




이 이야기를 한 이유는, 내가 한 일본인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들에 왜 흥미를 갖고, 그것을 좋아하는가? 에 대한 나 나름대로의 진지한 결론을 최근에야 어느 정도 납득할 수준으로 내렸기 때문이다.


요즘과 같은 초고속의 시대에, 한 문화가 다른 문화로 건너가 우아하게 혹은 엉망진창인 상태로 새로 태어나는 것은 흔한 일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문화의 뒤섞임은 그 자체로서 '왜 그렇게 되는가?' 를 돌아볼 수 있는 정말 중요한 사료가 된다. 나는 내가 왜 나로서 생각하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런 뒤섞임의 근원이 어디에서 출발 하는가를 보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요 며칠간 내 미국에서의 삶과 작업을 브런치에 정리하는 동안 그가 쓴 [슬픈 외국어]를 간간히 다시 읽었다. 왜냐하면 내가 미국에 대해 느끼고 내가 미국이란 나라에서 이방인이 된 그 감각과 가장 비슷한 형태의 무엇을 누군가가 글로 썼던 것이 그 [슬픈 외국어]이기 때문이다. 


물론 거기에는 수많은 따져봐야 할 것들이 존재한다. 나와 [슬픈 외국어] 사이에 공통분모로 존재하는 것은 아시아인으로서 미국이란 나라에 대해 각자 속한 사회에서 느낀 점들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실로 큰 차이가 존재한다. 


그 차이는 작가인 그가 추축국-패전국-의 국민인 그가 승전국인 미국에, 미국과 일본의 날 선 경제전쟁이 있던 1990년대 초에 미국에 머물렀다는 점과, 그 전쟁의 승전국-미국-에 의해 여러 가지 역사 정치 문화 경제적인 간섭(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을 받으며 성장한 나라의 국민인 내가 글로벌 금융위기라는 정체불명의 공포가 그 실체를 드러내며 우리의 일상에 엄습하던 시기(2010년 초, Occupy Wall Street운동이 벌어지던 때)에 그곳에 머물렀다는 점이다.


일본인으로서 그의 글은 그 시기에 쓰였고, 한국인으로서의 내 경험과 기억은 불과 몇 년 전 과거의 것이므로 거기엔 그만큼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2019년인 지금 보자면 그 차이는 생각보다 매우 거대하다. 일본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일본인임과 동시에, 그가 스스로 말하듯 그의 어린 시절을 미국 문화의 세례를 흠뻑 받으며 살아남은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인인 나로서는 그가 가진 (내가 느끼기에) 일본적인 사고방식의 흔적과 그가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고 소화해 자신의 것으로 체득한 미국적(혹은 글로벌적 이방인으로서의) 사고방식을 동시에 보게 된다.


나는 이 시점에서 그 뼛속 깊이 다른 차이점과 함께 묘한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나와 그에게 미국은 미국이고, 그에게 미국은 미국이며, 나에게 그는 일본인임과 동시에 미국이란 나라에 대해 (혹은 이방인이 되는 것에 대해) 느끼는 것이 이해가 되는 타인이다.




이 점을 분명하게 하고 넘어가려는 이유를 계속 얘기하는 이유는, 역시 저는 저대로 이런저런 짬뽕 문화의 세례를 받으며 자랐고(저 하루키씨의 책을 고등학생 때 읽었으니) 그 상태에서 '이방인이 되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막연한 것을 찾아 미국이란 나라에 갔었다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어느정도는 확립해야 앞으로 할 미국에 대한 얘기들을 좀 더 편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입니다. 그 슬픈 외국어 이야기도 곁들여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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