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대, 물려 보셨어요?
원래(?) 타지 생활을 하다 보면 한두 가지쯤 남에게 말 못 할 아주 사적인 비밀이 생기기 마련이다. 미국살이에서 내게도 갑작스레 찾아왔던 메가톤급 [남에게 절대 말 못 할 사정]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빈대 붙은 사연."되시겠다.
때는 2016년 가을, 몇 주 전부터 어디선가 들려오는 라디오 소리에 나는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오죽했으면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 내가 같은 건물의 위층 아래층을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대질(?)을 했을까.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그 라디오 소리는 반대편 건물에서 나는 것임을 알게 되었고 나는 이걸 대체 어쩌나 하며 끙끙 앓을 수밖에 없었다. 같은 건물이면 조용히 해 달라고 할 수 있는데 건너편 건물인 경우 이건 좀 애매한 것이다.(내가 사는 건물이 아니면 출입하기조차 힘들다.) 어쨌든 그 라디오 소음은 계속 들리는 듯 안 들리는 듯 내 신경을 건드렸고, 나중에는 창 밖으로 보이는 건너 건물 창문 라디오에 대고 물총이라도 쏘고 싶은 정도가 되었다.
911에도 전화를 해 보고 311에도 전화를 해 보고 귀를 틀어막아보고 나도 음악을 틀어보기를 몇 주, 결국 나는 당당한 누요커로서(?!) 언젠간 저 건너편 집에 항의를 하러 가기로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던 어느 날,
나는 친구와 한가롭게 첼시마켓에서 랍스터를 먹고 있었고 그 와중 오른쪽 다리에 뜨끔! 한 느낌을 받았다. 말은 쉽게 했지만 내가 랍스터를 먹을 일은 일 년에 몇 번 있을까 말까 한 일. 그렇기 때문에 첼시마켓에서 발생한 갑작스럽고도 통렬한, 마치 불 꼬챙이로 콕콕 쑤셔대는 그 감각은 너무나 선명하게 저 랍스터의 맛과 함께 내 뇌리에 박히고 말았다.
'엄청 큰 모기한테 물렸나?!'
저런 순진한(?) 생각을 하며 집에 돌아와 뜨끔했던 자리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이건 절대로 모기 따위가 아닌데?'라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인터넷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Bed bug bite / 빈대 물린 자국
[심의 규정상 빈대 물린 자국 사진은 올리지 않겠습니다]
그렇다. 두말할 것 없이 나는 빈대[Bed bug : 베드버그]에 물린 것이었다. 이런 정신 나갈 일이 있나. 나만의 안락한 거처가 얼마 전 부터 소음에 방해받더니 거기다 빈대에게 침공?. 나는 막바로 빈대와의 전쟁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고, 곧 이 전쟁에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 희망이 없나요?"라고 한다면 [빈대 잡으려 초가삼간 태운다]라는 우리네 속담을 얘기할 수 있겠다. 나는 전에 저 속담을 '별 것 아닌 것으로 호들갑을 떤다.'는 비유로 이해하고 있었는데 웬걸. 그건 비유 같은 게 아니라 진짜 겉말과 속 뜻이 일치하는, '빈대는 집을 홀랑 태우지 않는 한 잡을 수 없다.'라는 뜻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빈대가 DDT라는 살충제로 구제할 수 있었으나 DDT가 발암물질임이 밝혀진 이후 그것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기에 현대의 빈대 잡는 약들이 대체로 효과가 미흡해졌다는 것이 첫째 이유고, 둘째로 집안의 모든 것을 뒤집어엎어가며 약을 뿌려대도 옆집으로 잠깐 이사를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바퀴벌레 저리 가랄 정도의 번식력과 장악력엔 손과 발을 들 수밖에 없었다.
자, 지금은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지만, 저 당시 나는 뉴욕에 있는 그 어떤 친구에게도 이 사정을 얘기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베드버그(빈대)가 있는 집에 사는 사람 = 베드버그 전파자]라는 명확한 공식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빈대 잡는 법을 물어볼 수 없고, 하루 재워달랠수도(이유를 말할 수 없이) 없는 그 먹먹함.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누군가의 집에 빈대가 있다(생겼다) 면 "우리 당분간 만나지 말자."로 한 순간에 축약되는 것이 뉴욕에서 빈대의 제왕적 입지란 사실.
한 번 떴다 하면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거리를 두게 되어버리는 빈대는 바로 이렇게 생겼습니다. 노약자 클릭 금지.
그렇게 몇 주 전부터 들려오던 시끄러운 라디오 소리와 날벼락처럼 들이닥친 빈대는 내 정신을 빠른 속도로 피폐하게 만들었다. 소음에 빈대라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며칠간 빈대와 사투를 벌이던 나는 그날따라 유난히 크게 들려오는 라디오 소리에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 [건너편 건물에 어떻게든 들어가 따지기]를 결행한 것이다. 도대체 무슨 용기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건너편 건물 입구를 쾅쾅쾅쾅 한참 두드렸고 결국 누군가 건물 입구를 열어주기에 이르렀다.
나는 몇 주 전부터 누군가가 라디오를 크게 틀지 않느냐, 건너편 건물에 사는 나는 그 소리 때문에 아주 괴롭다. 고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그랬더니 자기는 라디오 소리가 들리지는 않지만 몇 주 전 누군가가 이사를 왔고 그 이후 건물 전체에 빈대가 퍼져 아주 고생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
모든 정황상의 물음표들이 한 번에 끼리릭 하고 들어맞았다. 내 고요와 청정(?)한 삶을 두 방향에서 한 방에 날려버린 미운 사람의 존재와 위치가 그 순간 확연해진 것이다.
나는 그 집 앞에 서서 심호흡을 한 후 초인종을 눌렀다. 바야흐로 내가 맞서(?)야 할 상대를 만나기 위해. 심호흡의 순간 이후 나는 무슨 용기였는지 모르겠으나 라디오에 대해(빈대에 대해 확증까진 없었으므로) 매우 격하게 따질 수 있었다. 그 라디오를 꺼버리지 않으면 다음에는 경찰과 함께 날 만나게 될 것이라며, 지금 생각으로는 얼토당토않은 격노를 토했다.
허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이후 내가 라디오 소리 때문에 스트레스에 시달렸는지 조차 기억이 없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결국 빈대와의 전쟁에서 처절하게 패배한 후, 가지고 있던 옷을 몽땅 버리고 가구 몇 가지만 챙겨 우리나라로 짐을 몽땅 부쳐버리는 격변 속에 묻힌 것일 터이다.
그렇게 나는 화려(?)했던 맨하탄 홀로 살이를 마무리 당하고, 브루클린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지금이야 빈대가 없는 우리나라에서 희희 거리며 이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때 당시엔 누구에게 하소연 조차 못할 비밀이었다는 것이 오늘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이야기.
빈대, 아휴, 물려보시면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