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게 있다면
나는 사진 작업에 있어 도구를 굉장히 가리는 편이다. 그런 나의 까탈은 내가 지향하는 작업의 목표보다 선행한다고까지도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내게 작업물은 결과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뭐가 어떻든 작품은 경험 다음에 오는 것이다. 당연히(?), 나는 결과물보다는 행위가 좀 더 중요하며, 행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이 행위를 해야겠다고 느끼는 황홀한 순간 그 자체라 여긴다.
나는 내 사진에 대해 "사실 아주 빠른 사진."이라고 설명하곤 한다. 그 이유는 내 트리거가 작동하는 순간이 아주 빠르게 왔다 가고, 내가 해야 할 일은 가능한 한 빠르고 능숙하게 그 순간에 대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내 직관에 가장 명료하게 반응하는 도구다.
"하늘에 뜬 달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광대하게 펼쳐진 수페리어호는 그 달을 떠받들고 있었고 사방은 고요했다. 길 옆에 간신히 주차시킨 차는 자전거 교통 표지판에 헤드라이트를 뿌리고 있었다. 호수와 자작나무들은 주변의 모든 소리를 집어삼킨 것 같았다. 엔진의 예열음 까지도 모두 다. 나는 차 안에서 나를 기다려주는 친구들에게 감사했다. 그들이 왜 밖으로 나와 나와 함께 이 장면을 보지 않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안타깝다는 생각 또한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것이 내가 친구들을 무시하거나 한다는 혹은 나 혼자만 이 강렬한 무엇(아름다움이라고 해 두겠다)을 누렸다는 비뚤어진 기쁨도 아니었다. 그저 이 순간은 이렇게 되어야만 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달에게도, 나무들 에게도 그리고 친구들 에게도. 모든 것에 감사하고 벅찼던 것이라고, 나는 기억한다. 나는 계속해서 셔터를 누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내 작업은 나의 작은 감동의 불씨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사실 그 순간이 나로 하여금 완성된 환희로 완결되지 않기 때문에 작업 행위를 거쳐 결과물로 남는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어떻게든 내가 겪는 황홀을 그대로 사그라뜨리지 않게 하기 위해 카메라라는 도구를 사용할 뿐이다.
결국 카메라는 절정의 순간과 그걸 만끽하는 나 사이에 끼어드는 차가운 중재자 비슷한 존재다. 한 큐레이터는 내게 그것에 대해 "그거 콘돔이네요. 콘돔."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그 말에 "와. 듣고 보니 그러네요."라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나는 카메라라는 도구가 내 무의식의 순간에 흥을 깨는 존재가 되지 않길 바라며 그것은 결국 도구를 고르는 까탈스러움으로 나타난다. 가능한 한 작은 크기, 가벼움, 작은 작동음 그리고 직관적인 사용 방법 등등. 그리고 거기에 더해 가장 높은 품질의 이미지를 보장할 마음에 쏙 드는 그런 도구를 찾아 헤매는 것.
하지만 따지고 보면 진짜가 다가온 순간. 소리가 크고 , 생긴 게 마음에 안 들고, 결과물이 마음에 차지 않을 것이 분명할 것임에도 몸과 마음은 이미 그 현상에 반응한다. 찰칵찰칵. 그리고 이런 경우 결과물이 마음에 들거나 들지 않거나에 대해 사실 도구가 끼치는 영향은 미미한 편이다. 나중에 신나게 (혹은 울면서) 작업을 하다 보면 '어라? 이거 어떤 카메라로 찍었더라?' 라며, 그 당시 어떤 도구를 썼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작업을 할 일이 없다는 확신조차 들 때- 왠지 내 마음에 쏙 드는 완벽한 도구 -카메라-를 가지고 있으면 좀 더 이상적인 작업물을 얻을 기회가 조금이나마 커지지 않을까? 하며 늘 도구에 얽매인다. 이건 이래서 좋고 저건 저래서 싫다. 이걸 샀다 저걸 팔고, 잠깐 뛸뜻 기뻐하고 한참을 땅이 꺼져라 후회한다.
이 정도면 강박이다? 그럼요. 강박이죠. 그게 그래서 어려운 거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