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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do Lee Dec 22. 2019

고래 사진관 or 고래 현상소

필름 쓰세요?


"아뇨 아뇨. 전 필름은 사용하지 않아요. 그래도 프린트는 해야 하고..."


충무로에 위치한 [고래 사진관] 혹은 [고래 현상소]는 조금 특이한 곳이다. 내가 사진을 배우고 시작할 무렵엔 상상할 수 없었던 [셀프 스캔]을 주 서비스로 제공한다. 셀프 스캔이란 자신이 촬영하고 현상한(직접 현상을 하든, 업체에서 현상을 하든) 필름을 자기 자신이 직접 스캐너로 스캔하여 디지털 파일로 저장하는 것이다. 물론 스캔 후에 인화도 가능하다.


신세 엄청 진 Epson Surecolor P9000 프린터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기인데, 97년쯤 올림푸스의 뮤 2로 사진을 찍다가 동네 현상소가 아닌 전문점에서 현상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다. 그때, 물어물어 충무로의 유명한 전문 현상소를 찾아가 뿌듯하게 "이거 전부 현상해 주세요."하고 맡긴 후 결과물을 찾았을 때 깜짝 놀랐다. 


사진은 한 장도 뽑아놓지 않고, 현상된 필름만 덜렁 내게 넘겨줬기 때문이다. "엇?"하고 당황하는 내게 현상소 직원도 당황하여 "현상해 달라고 하셨는데요... 인화 주문은 안 하셔 가지고..." 나는 그날에서야 현상이 필름을 처리하는 것이고 인화가 그 필름을 토대로 종이에 프린트해 사진으로 만드는 것이란 단어 정의를 몸으로 배웠다.


그 시절의 필름 현상 전문점은 엄청 바쁜 전문 산업현장에 가까웠기 때문에 작업 의뢰에 대한 용어의 사용에 대한 민감함이 좀 있었다. 별것(?)도 아닌 증감, 감감, 마운트, 트리밍... 이런 말을 잘 모르면 그것을 물어보기 머쓱한 뭐 그런 것. 그 산업적 분위기의 벽은 의외로 견고했다.


핫셀블라드, 일포드 그리고 고래


하지만 디지털카메라와 디지털카메라를 내장한 스마트폰이 온 세상에 퍼져나간 이후(그리고 인터넷까지), 사진술이 가지고 있던 산업적이고 어렵게 느껴지던 장벽은 사르르 허물어졌다. 실제적 이미지 산업은 디지털로 옮겨졌고 필름 기반의 산업은 극소수의 전문가와 그보다 훨씬 많은 취미가 들을 위한 산업으로 그 변화를 맞이했다. 이제 필름을 사용하는 것은 즐겁거나 신기한 일이지, 미디어의 형태 자체가 그것밖에 없기 때문에 그 구조를 학습하고 사용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 사용되는 미놀타의 TC-1보단 예쁜 배지 TC-1이 더 친숙한 시절이 됐다구요. 인스탁스도 비슷비슷.


그래서 나는 고래 사진관에 간다. 어쩌면 너무 형식과 두서가 없는 것이 아닌가 싶은 걱정(?)이 들기도 하지만, 내가 옛날 생각했던 '아 좀 분위기 물렁물렁한 전문점(!?)이 있으면 좋겠다.'에 꽤 근접하기 때문이다. 


후지 프론티어, 코닥, 노리츠 등 십여년 전 산업용으로 사용되던 기기들로 누구라도 직접 스캔이 가능하다


마치 좋은 기자재들을 왕창 가져다 놓은 대학교 사진 동아리 부실 같은 그런 느낌. 초보, 취미가부터 전문가까지 마구 뒤섞여 있는 그 허허실실함이 아무 할 일 없는 나를 가끔 그곳으로 부른다. 물론 내가 해야 하는 작업도 사실상 전부 가능하니까- 라는 전제조건도 충분히 만족한다.






랜트용 카메라들, 아직도 이렇게 다양한 필름이 나오나 싶은 필름들, 그리고 여행가방에 붙이기 좋은 온갖 잡동 액세서리들이 매번 갈 때마다 바뀌는 이 느슨함이 매력. 이런 전문점(?)은 본 적도 없고 다른 곳에서 볼 일도 없을 것이 분명하다. 


분명하다니까요?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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