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쓰세요?
"아뇨 아뇨. 전 필름은 사용하지 않아요. 그래도 프린트는 해야 하고..."
충무로에 위치한 [고래 사진관] 혹은 [고래 현상소]는 조금 특이한 곳이다. 내가 사진을 배우고 시작할 무렵엔 상상할 수 없었던 [셀프 스캔]을 주 서비스로 제공한다. 셀프 스캔이란 자신이 촬영하고 현상한(직접 현상을 하든, 업체에서 현상을 하든) 필름을 자기 자신이 직접 스캐너로 스캔하여 디지털 파일로 저장하는 것이다. 물론 스캔 후에 인화도 가능하다.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기인데, 97년쯤 올림푸스의 뮤 2로 사진을 찍다가 동네 현상소가 아닌 전문점에서 현상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다. 그때, 물어물어 충무로의 유명한 전문 현상소를 찾아가 뿌듯하게 "이거 전부 현상해 주세요."하고 맡긴 후 결과물을 찾았을 때 깜짝 놀랐다.
사진은 한 장도 뽑아놓지 않고, 현상된 필름만 덜렁 내게 넘겨줬기 때문이다. "엇?"하고 당황하는 내게 현상소 직원도 당황하여 "현상해 달라고 하셨는데요... 인화 주문은 안 하셔 가지고..." 나는 그날에서야 현상이 필름을 처리하는 것이고 인화가 그 필름을 토대로 종이에 프린트해 사진으로 만드는 것이란 단어 정의를 몸으로 배웠다.
그 시절의 필름 현상 전문점은 엄청 바쁜 전문 산업현장에 가까웠기 때문에 작업 의뢰에 대한 용어의 사용에 대한 민감함이 좀 있었다. 별것(?)도 아닌 증감, 감감, 마운트, 트리밍... 이런 말을 잘 모르면 그것을 물어보기 머쓱한 뭐 그런 것. 그 산업적 분위기의 벽은 의외로 견고했다.
하지만 디지털카메라와 디지털카메라를 내장한 스마트폰이 온 세상에 퍼져나간 이후(그리고 인터넷까지), 사진술이 가지고 있던 산업적이고 어렵게 느껴지던 장벽은 사르르 허물어졌다. 실제적 이미지 산업은 디지털로 옮겨졌고 필름 기반의 산업은 극소수의 전문가와 그보다 훨씬 많은 취미가 들을 위한 산업으로 그 변화를 맞이했다. 이제 필름을 사용하는 것은 즐겁거나 신기한 일이지, 미디어의 형태 자체가 그것밖에 없기 때문에 그 구조를 학습하고 사용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고래 사진관에 간다. 어쩌면 너무 형식과 두서가 없는 것이 아닌가 싶은 걱정(?)이 들기도 하지만, 내가 옛날 생각했던 '아 좀 분위기 물렁물렁한 전문점(!?)이 있으면 좋겠다.'에 꽤 근접하기 때문이다.
마치 좋은 기자재들을 왕창 가져다 놓은 대학교 사진 동아리 부실 같은 그런 느낌. 초보, 취미가부터 전문가까지 마구 뒤섞여 있는 그 허허실실함이 아무 할 일 없는 나를 가끔 그곳으로 부른다. 물론 내가 해야 하는 작업도 사실상 전부 가능하니까- 라는 전제조건도 충분히 만족한다.
랜트용 카메라들, 아직도 이렇게 다양한 필름이 나오나 싶은 필름들, 그리고 여행가방에 붙이기 좋은 온갖 잡동 액세서리들이 매번 갈 때마다 바뀌는 이 느슨함이 매력. 이런 전문점(?)은 본 적도 없고 다른 곳에서 볼 일도 없을 것이 분명하다.
분명하다니까요? 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