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항상 소설이나 시가 좋아. 카테고리 구분을 할 때, 비문학에는 손이 거의 안 가. 늘 그래.
그리고 사실 뭔가 가르치려 드는 책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책들 많지 않은가. 네 하루를 뭐 어떻게 쪼개 써야 한다느니, 일찍 일어나야 한다느니, 특정한 작업에 필요한 일련의 과정을 어떻게 짜야 한다느니,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식습관을 가져야 한다느니 하는 그런 책들. 좀 각자 알아서 살게 내버려 두면 안 될까요? 펼쳐보면 별 내용도 없으시던데, 혼자 생각하고 말면 될 걸 종이 아깝게 굳이 출판까지 해 가며, 뭐 그리 혼자 확신에 차서 열을 올리시는지.
앤 라모트의 '쓰기의 감각'. 표지에 쓰여있는 소개 문구는 '삶의 감각을 깨우는 글쓰기 수업'. 이 책이 94년 출간된 이래 작가 지망생 등 어떻게든 글 쓰는 일과 연관이 있는 사람들에겐 늘 필독서였다고 하는데, 책장을 펴고 앞의 몇 챕터를 읽기 전엔 이것도 상기한 그런 종류의 책들 중 한 권이겠거니 싶었다. 작문 기술, 작법, 요령 등을 그럴듯해 보이게 써 놓고 자신의 방식이 정답에 가깝다고, 아니 유일한 정답이라고 우쭐댈 줄 알았다. 다행히,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
글쓰기 수업이라는 홍보용 카피 문구를 달고 있지만, 이 책은 작문이나, 한 작품 전체의 구성을 짜는 등의 세부적인 기술을 가르쳐주는 책과는 약간 거리가 있다. 굳이 빗댈 거리를 찾자면 각 대학 모든 과의 일학년들이 듣는 개론 같은 느낌이라고 하면 될까. 글쓰기에 대해 a부터 z까지 세세히 알려주며 '너도 이렇게 하면 되는 거야!'라고 말하는 책은 전혀 아니다. 그보다는 기성 작가로써 앤 라모트 본인의 고민과 성찰, 매너리즘과 극복, 글쓰기를 업으로 삼고 있는 자신만의 독특한 노하우, 스스로를 향한 꾸준한 동기부여에 대한 노력의 기록이다. 막대한 편수로 압도하는, 많은 분량의 에세이가 묶여진 형식을 가지고 있고, 각각의 에세이는 글을 쓰는 행위 자체에 대한 저자의 개인적 생각과 경험, 기억들을 다양하게 담아내며 통일성을 가진다. '글쓰기에 대한 고민'이라는 일관된 주제로 이만큼이나 다양하고, 또 많은 분량의 에세이를 써 출판했다는 사실부터가 저자의 성찰의 깊이를 방증한다.
자신의 생애사에서부터 이야깃거리, 글감을 한번 찾아내보라는 작가의 제안부터 시작하는 에세이의 흐름은 그 날 것의 글감을 다듬는 법으로 이어진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책은 결코 작법에 대한 세부적 방법론에 관한 책은 아니지만, 플롯을 짜는 것, 그것을 수정하고 매끄럽게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자세한 설명을 제공한다. 실재적인 도움이 될 수도 있고, 대체로 독자의 입장에서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는 그 이면의 새로운 것, 글을 쓰는 작가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삼백 페이지가 넘는 이 기대 이상 분량의 글에서 가장 와닿던 부분은 오히려 초반부에 등장했다. 조잡한 형태의 초고를 많이 써 봐야 한다는 내용의 에세이었는데 한 대목을 뽑아 보겠다.
'나와 내가 아는 다른 작가들 대부분에게 있어, 글쓰기는 그다지 신나거나 기쁜 일이 아니다. 실제로 내가 무엇이라도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정말로 조잡한 초고를 쓰는 것뿐이다. 거의 밑그림이나 설계도에 해당하는 원고 말이다.
거친 초고는 아이들의 그림과 같다. 되는 대로 이것저것 다 넣어 놓고는 온갖 장소에 굴러다니게 내버려 두는 편한 그림 말이다. 아무도 그걸 볼 리 없고 나중에 다시 그려도 그 이상의 그림은 그릴 수 있으니 잃어버릴까 봐 걱정도 안 된다. 당신 내면에 존재하는 아이 같은 부분이, 어떤 목소리나 그림이 튀어나온다 하더라도 개의치 말고 모두 종이에 적기만 하면 된다.'
공감하지 않을 수 없고, 통찰에 감탄할 수밖에 없는 단락이다. 나 역시도 한동안 수준이야 어떻든 글을 써 보려 하면서 자주 느끼곤 하는데, 초고를 써 두는 행위 자체가 전체 작업에 있어서 굉장히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는 걸 실감한다. 또한 스스로도 밑그림을 그린다 생각하며 파편화된 문장과 표현들을 페이지 위아래 어디든 써 두고, 거미가 외곽부터 거미줄을 완성해 가듯 조금씩 다듬어 완성해 가곤 하는데, 이런 방법론이 나쁘지 않은 방식이라는 것에 뜻하지 않은 안도감을 얻는다. 정말 뛰어난 작가들에게도 글쓰기는 여전히 어려운 일이라는 문장은 살짝 웃음을 짓게 만든다.
이 밖에도, 저자는 글쓰기에 있어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것을 다분히 경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에 따르면 완벽주의는 압제자의 목소리이고, 글을 쓰려는 사람들을 구속하며, 볼품없는 첫 번째 원고를 시작하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고, 창조성과 장난기와 글의 생명력을 빼앗는, 단정함이라는 탈을 쓴 적이다.
앞서 엉성한 초고를 많이 써야 한다는 저자의 말과 어느 정도 맥락이 통하는 부분이다. 글에 있어 단정함, 깔끔함만을 쫓을수록 재치가 사라진다는 점 역시 어느 정도 동의한다. 사실 그보다, 반드시 누가 봐도 구성도 깔끔하고, 멋지게 완성된 무언가만을 써야 한다는 내 은근한 강박에 저자의 주장이 반기를 대신 들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조금은 있다. 나 역시 글을 잘 쓰지는 못하고, 그저 자신의 만족과 내 삶의 기록을 위해 블로그와 브런치를 하며 이런저런 글들을 써 보지만, 그런 와중에도 '아 이런 건 내가 잘 모르지 않나.',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는 건가.', '내 통찰력이 얕아 너무 협소한 부분만 집어내는 건 아닌가.' 지레 걱정하며 시작조차 두려워하는 부분들이 결코 없지 않다. 그런 것들은, 더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애써 가르치려 들지 않고, 오랜 경험과 고민을 거친 '프로 글쟁이'와 긴 대담을 나눈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책이다. 모든 작가 지망생들의 필독서이자 가이드북이라고? 글쎄, 그건 사람 나름이고, 이것 역시 누구나와 같은 한 사람의 생각이고, 그녀의 방법일 뿐이다. 누군가에겐 정답에 가까운 것일 수도, 누군가에겐 확연한 오답일 수도 있겠지. 저자 역시 이것이 꼭 맞는 것들이라 강요하지 않으며, 저마다의 방법론을 찾기를 소망하고 있다.
한 번쯤은 이런 책도 나쁠 것 없더라. 이런 색다른 형태의 동기부여는, 저자의 말마따나 무언가를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