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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기동 일인가구 Nov 01. 2018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시간과 기억은

시간과 기억은 다른 많은 것들에 앞선다

 아이의 첫 울음을 모든 부모들은 선명히 기억한다. 아늑하지만 어둡고 축축했을 자궁안에서 힘겹게 나와 세상의 밝은 빛을 처음 마주한 아이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를. 가만히 누워만 있던 아기가 처음으로 혼자 몸을 뒤집고, 뽀얀 얼굴로 미소 짓고, 옹알이가 점차 단어가 되어가고, 첫 걸음마를 떼던 순간들을, 엄마와 아빠만 알던 아기가 처음으로 친구를 사귀는 모습을 부모들은 기억한다. 그런 기적 같은 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가며 미완의 가족은 천천히 만들어지고, 같이 공유하는 소중한 기억들은 생물학적 혈연관계로서의 일차원적 애착 혹은 본능, 또는 윤리적 의무감을 넘어서게 해 주는 그 이상의 것을 가지게 해 준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가족이 탄생한다. 비록 그것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되는 일이 자주 있지는 않다만, 가족은 결코 핏줄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남부럽지 않은 한 가족이 있다. 잘 나가는 대형 건축회사 안에서도 핵심 팀의 책임자로써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는 마흔두 살의 료타. 사내연애로 만나 지금은 전업주부인 스물아홉 살의 미도리. 그리고 큰 눈망울을 가진, 다분히 여린 성향을 가진 여섯 살짜리 소년 그들의 아들 게이타. 다소 전형적일 만큼 행복하고 평범한 이 가정에 뜻밖의 비극이 닥친다. 

소중한 자신들의 아이가 실은 병원에서 태어난 직후 다른 부부의 아기와 뒤바뀐 아기라는 걸 6년 만에 알게 되었을 때, 부모는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까. 어떠한 형태의 고민들을 가지게 될까. 자신들의 여태까지의 행복과, 구축해온 세상이 부정당하는 듯한 비현실적 상황 속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정답에 가까운 것인지, 정답이 있기는 한 문제인지, 누구도 쉽게 알 수 없다. 여전히 아이를 전과같이 대할 수 있을까. 생물학적 '핏줄'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서 과연 얼마큼의 가치를 지니는가. 그것은 시간과 기억에 우선할 수 있는 것인가. '낳은 정'과 '기른 정'중 무엇이 더 중요하냐 하는 고리타분한 화제는 그것이 현실이 되었을 때, 가벼운 입씨름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가 된다. 이내 료타와 미도리는 고민에 빠지고, 저마다의 반응과 대처를 보인다. 며칠 후 유전자 검사를 한 연구소에서 결국 게이타가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선고를 받았을 때, 가족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료타의 옆얼굴은 분노로 이르러지고 하얀 뺨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제껏 이토록 격하게 분노를 드러낸 표정은 본 적 없었다. 

'역시.. 그런 거였어.' 

료타가 악다문 이 사이로 쥐어짜내듯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미도리의 눈에서 눈물이 가셨다. 닦아도 닦아도 멈출 줄 모르고 흘러내리던 눈물이, 료타가 한 말의 의미가 미도리의 마음속으로 서서히 침투했다. 



료타의 기대를 온전히 채우지 못하던 여리디여린 게이타에 대한 불만족과 옅은 실망감의 원인이 핏줄의 문제로 전이되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이 시점에선 아직 아버지로서 미성숙한 료타에겐 게이타에게 들인 그동안의 노력과 기대가 처음부터 잘못된 방향이었다고 부정당하는 느낌이었을지도. 게이타를 너무나 사랑하던 미도리에게도 그의 말은 비수가 되어 꽂힌다. 



손해배상 및 사법적 절차를 위한 병원으로부터의 연락과, 자세한 논의와 사과를 위해 그들이 준비한 자리를 통해 료타와 미도리는 친자식이 바뀐 상대 부부 유다이와 유카리를, 진짜 아들인 류세이를 알게 된다. 병원 측의 중재를 통한 몇 번의 만남과, 그들 가족들만의 몇 번의 논의로 처음 병원 측의 주장대로 아이들이 더 크기 전에 '교환'의 과정을 갖기로 한다.


   

아직 미성숙한 아버지인 료타에게, 본인 역시도 어린 시절 좋지 못한 상황에 자신의 친아버지에게 정을 받지 못하고 큰 료타에게, '아버지'라는 개념은 시간과 기억을 함께한 후천적 존재가 아니라, 핏줄이 우선되는 선천적 개념, 동물의 그것에 가까운 개념이다. 미도리와 달리 료타에겐 게이타를 보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고, 존재를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류세이를 집으로 데려와 이제부터는 자신을 아버지라 부르라 강요한다. 



'왜? 아저씨는 아빠가 아니잖아. 아빠 아니야.' 

'지금부터는 아저씨가 아빠야.' 

'왜?' 

'왜든 간에.' 

'왜?' 

류세이도 물러서지 않았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물었다. 



당연히 유다이가 자신의 아버지라 생각하는 료타의 친자식 류세이는 료타에게 끊임없이 왜 당신을 아빠라 불러야 하는지 묻는다. 류세이의 반복되는 '왜?'라는 질문은 소설 전체를 관통한다. 이젠 역으로 부모들이 답을 고민해야 할 질문이다. 한 사람을 아버지로, 부모로 만드는 건 무엇인가. 단순한 혈연일 순 없다고, 시간과 기억은 그런 것에 우선한다고 소설은 꾸준히 말한다. 


료타는 다섯 시가 지났을 즈음, 게이타를 불러서 둘이서만 강가로 갔다. 료타는 게이타 옆에 웅크려 앉았다. 

'게이타, 저쪽 집에 가더라도 걱정할 건 전혀 없어. 류세이네 아빠랑 엄마도 널 아주 좋아한댔으니까....' 

그러자 게이타가 조금 빠른 말투로 료타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빠보다 더?'



일본 영화와 소설 특유의 잔잔한 분위기가 잘 깔려 있다. 난 그걸 참 좋아한다. 그러면서도 눈물을 참을 수 없는 부분들이 꼭 있다. 게이타가 자신의 시선으로 아빠를 찍은 사진들을 료타가 나중에서야 확인할 때, 그리고 종반부 료타와 게이타의 대화에선 자연히 눈물이 흘렀다. 



총평을 해야 한다면 '좋은 영화이자 소설'이라고 말하는 게 맞겠지만, 다소 전형적인, 사실 거의 클리셰에 가까운 개개의 등장인물들의 설정은 아쉬움이 남는다. 전체적인 줄거리를 지탱하는 '아이가 바뀌었다'라는 설정 역시 상당히 예전의 것처럼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게 좋은 드라마로 잘 풀어낸 반면, 그것을 지탱해야 할 등장인물들은 지극히 전형적이다. 잘 나가는 샐러리맨 남자 주인공과, 일본발 소설이나 영화에 늘 등장하는 어리고 순종적인(결혼과 동시에 퇴사를 한) 아내 구도는 신물이 날 정도고, 여전히 한국만큼이나, 어쩌면 훨씬 더 고리타분한 일본 가부장제의 모습이 소설 곳곳에서 날 것 그대로 드러난다. 이런 분위기와 태도가 소설 전반에 깔려있다는 사실은 이와 같은 지점들에 민감하지 않더라도 쉽게 알 수 있을 정도다. 만약 이상하거나, 불편한 점을 전혀 못 느끼겠다면 당신은 지금의 시대정신에 상당히 뒤처져 있는 사람인 걸 자각하시길. 일련의 사건들의 전개에서 중요 사안들의 결정권자들은 결국 양쪽 가족의 아버지들이며, 그들의 신념과 의지 아래 아내들인 미도리와 유카리의 고민과 선택은 쉽게 묻혀 버린다. 또한 이런 상황 속에서 어린 게이타와 류세이는 마치 료타와 유다이의 소유물인 양 희생되고 있다. 비록 소설의 종반부 진정한 아버지로서의 성장의 과정을 겪고 난 료타가 자신의 소유욕을 버리고 게이타의 인격을 존중하며, 바람직한 결말에 다다르는 듯하지만 그동안의 미성숙한 부모로서의 기간 동안 게이타와 류세이 모두가 겪어야 했던 경험들이 상당히 폭력적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을 위한 괜찮은 성장드라마라는 의견에는 동의하는 편이다. 결국 두 아이들 모두 본래의 가정으로 돌아갈 결말이 어느 정도는 짐작됨에도 소설의 페이지나 영화의 러닝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런 전개가 여태 나오지 않는 것에 불안하기도 했다만, 결국 나름의 해피엔딩이었다. 



난 간단한 일어는 알아들을 수 있지만, 읽는 건 힘들다. 원제는 そして父になる. 역시 읽지는 못하겠지만, 독음하면 '소시테 치치니 나루'라고 한다. 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번역본의 훌륭한 제목은 역자의 센스가 아니라 원작자인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문장이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그렇게'의 과정을 이만큼 잘 풀어낼 수 있을까.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고,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 역시 시간이 필요하다. 성장하는 건 아이들뿐만이 아니다. 그렇게 부모가 된다. 그리고, 그렇게 가족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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