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회사를 그만뒀다. 고민의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그건 어렵지도, 생각만큼 복잡하지도 않은 과정이었다. 이런 결말이 그리 길지 않은 시간 안에 올 거라는 건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시기의 문제였을 뿐. 조급했던 선택은 대체로 결과가 좋지 않은 법이다. 입사한지 두 달 가까이 지났을 때 이 일과 내 삶의 접점이 결코 크지 않다는걸, 이건 내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건 아쉽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차라리 빨리 알아서 다행일까. 견딜 수 없는 것들은 많았는데, 나에게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퇴사에 대한 고민을 실행에 옮기던 과정 안에 다소 충동적인 면이 없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잘 된 일이라 생각한다. 퇴사 전의 아침과, 지금의 아침을 지켜보면 답은 명확하다. 단순한 여유로움이나 지겨운 업무로부터의 해방, 다양한 스트레스의 극적인 감소와 같은 표면적인 것뿐만이 아니다. 물론 그것도 퇴사 후 일주일 정도는 내게 아주 중요한 차이였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겠다. 비생산적 업무들, 내 것이 아닌 시간들, 은근한 불안감, 억지웃음으로 점철된 조직생활, 내겐 의미 없는 숫자들. 조금 양보하면, 사실 그런 건 버티는 삶의 영역 안에 들어갈 만도 했다. 그러나 그 경계 안으로 집어넣는 것이 용인이 되지 않던 건 남의 일을 대신해 주는 듯한 꾸준한 불쾌함과, 내 삶에 대한 주체성의 완전한 상실이다. 내 하루는 내 것이어야 하는데, 그동안 그러지 못했다. 이제야 내 하루의 주도권이 온전히 나에게 있다. 가까운 길을 놔두고 멀리 돌아왔다.
주위 사람들은 잘만 다니다가 갑자기 그만둬 버린 줄 안다. 그게 아니라면 여태 다니는 줄 알거나. 이는 서로에 대한 완전한 이해와 적극적 사랑은 다소 결여되어 있는 내 관계들과, 그것이 가능하다는 걸 끝없이 의심하는 스스로의 태도와, 어느 정도의 거리 유지가 몸에 배어 있는 내 유난한 폐쇄성이 만들어낸 결과다.
일을 시작하고 얼마간은 나를 떠나라고 부추기는 여러 이유들을 꾹 누르고 열심히 다녀 볼까 했던 것도 사실이다. 오히려 그런 것들을 성숙한 선택이라 여기기도 했다. 나름대로 괜찮게 살고 있는 줄 알았다. 한동안은 정말 그랬다.
잘 살아. 잘 지내. 이런 말들은 무심하고 또 모호하다. 역설적으로 그만큼 편리하다. 짧은 말이 한 사람이 살아가며 마주하는 수많은 굴곡들을 쉽게 덮어 감출 수 있게 한다. 혹은 한 사람의 굴곡을 타인이 멋대로 평평하게 만들어 버리는 데에 쓰이거나. 이 정도면 잘 살고 있다고 믿던 길지 않은 시간을 지나, 잘 살고 있음의 기준은 갈수록 낮아지고 포기하는 것들이 점차 많아져 감에도, 일하면서 동시에 퇴사와 다른 일을 고민하던 시간이 왔음에도 난 남들에게, 아니 남들보다도 스스로에게 여전히 잘 살고 있다고 잘 지낸다고만 되뇌었다. 그래야만 내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다. 도망치는 듯한 결말이 딱 한 장만 넘기면 보일 것도 같은데 애써 부정하고는 했다.
하지만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되어 가는 것이, 그게 두려웠다. 이러다가 무너진 기대에 대해서도 무뎌질까 봐, 억지로 익숙해져 버린 삶이 성큼 다가올까 봐, 그게 무서웠다. 얼마큼의 돈에 주체성을 완전히 빼앗긴 내 삶을 무기력하게 쳐다만 보고 있는 건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퇴근 후엔 꼭 좋아하는 것들을 하겠다던, 혹은 내 성장을 위한 어떤 것을 하겠다던 이상적이기만 하던 생각은 금세 흩어졌다. 하루의 가장 큰 낙이 정시 출근과 정시 퇴근 인건 슬픈 일이다. 더는 그러기 싫었다.
그래서 그만둔 것에 대해 아쉬움이 단 하나도 없느냐 하면, 어찌 그럴 수만 있겠나. 우습지만 항상 무언가를 그만하게 될 때, 아쉬
운 건 주된 것보단 부수적인 것들인 경우가 많다. 이번에도 그건 다르지 않았다. 어딜 가나 죽이 잘 맞는 친구가 한 명쯤은 꼭 있기 마련이다. 나와 같은 나이지만 일한 지는 꽤 되어 항상 너무 나를 잘 챙겨주고, 그러다가 많이 친해졌던 슬기에겐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뿐이다. 미안해 정말. 그 애에게 난 꽤나 손이 많이 가던 동료이고 친구였을 것이다. 그래도 내 선택을 조금이나마 헤아려주었으면 좋겠다.
종찬아 그래서 어떻게 살 건데? 뭐가 될 건데? 이미 많이 뒤처지지 않았어? 내가 나에게 건네는, 나를 옥죄는 질문들. 아! 이 지겨운 먹고사니즘. 모든 것에 답이 있어야 한다는 이 끔찍한 강박증적 태도. 이미 늦었다고 생각해 놓쳐버리고 살아온 수많은 것들. 사람이 어떻게 진보만 하며 살아가나. 안주할 때도 퇴보할 때도 있다. 그리고 이건 퇴보라 하기도 애매하지 않나. 먹고사는 문제야 최소한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당분간 마치 일하듯이 정말 많이 읽고, 또 신중한 태도로 잔뜩 공들여서 많이 써 보려 한다. 일단은 쓰는 것보단 읽는 게 먼저다. 한동안 소설과 시집, 산문집을 아주 많은 양을 잘 골라 먹어치울 생각이다. 그동안 이런 쪽에 오래 굶주렸고, 전반적인 수준이나 감각을 끌어올리는 데에는 이만한 게 없다. 얼마간 그러고 난 뒤에는, 한 주에 최소 몇 편의 글을 쓰겠다는 기준을 세우려 한다. 이것이 보통의 나와 같다면 처음의 과욕으로 기준을 지나치게 높게 잡았다가 점차 줄여갈 모습이 훤히 그려지긴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읽고 쓰는 작업 공간으로 사용하고 싶은 조용하고 의자가 편한 카페도 하나 알아뒀다.
내 걸 만들고 싶다. 금방 사라지는 것들 말고 차곡차곡 쌓여갈 수 있는 것들로. 그래서 그것들로 무얼 할 거냐 하면 글쎄, 난 그렇게 철저하거나 체계적이지 못하다. 쌓아두면 뭔가 도움이 되겠지. 많은 걸 완성하다 보면 무언가 길이 보이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와, 한 번쯤 그렇게 살아보고 싶은 어린 의지가 있을 뿐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얼마간의 휴가라고, 아니면 마침 지금이 7월인 만큼 여름방학이라 생각하자. 이럴 땐 졸업을 하지 말걸, 유예 상태로 걸어둘 걸 그랬나 싶다.
조만간 산문을 하나 쓸 것이다. 진짜 운도 없게 이 폭염에 잡힌 예비군 동미참 훈련만 끝나면 시작할 생각이다. 제목은 아마 '퇴사'가 되지 않을까 한다. 단순하게 직시하고 싶다. 무난한 삶에 꼭 한 번씩 균열을 만들어내는 이 기벽과, 그것 때문에 생긴 이 특이점에 대해 한번 정리해보고 쓰지 않고서는 그 무엇도 시작할 수 없으니 말이다. 이걸 쓰고 나면 전에 생각해 둔 것들 말고도 다양한 글감들을 찾아가면서, 많이 읽고 많이 보면서 살아갈 생각이다.
근사한 첫 문장을 오래 고민 중이다. 여전히 철없고 미성숙한, 반항기 다분한 소년이고 싶다. 시간이 지나도 항상 그랬으면 좋겠다. 성장기를 지나치게 오래 보내는 중에, 그만큼 더디지만 꾸준하게 크고 있었으면 한다. 새삼 깨닫지만 조급할 필요 없더라.
구구절절 캐묻지 않고 그냥 그러려니 해준 사람들에게 고맙다. 잘했다고, 말뿐일지 모르지만 부럽다고 했던 사람들은 같이 웃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니 이건 예고편이다. 앞으로의 삶에 대한 예고편. 선로를 이탈한 기차는 한번 하늘을 날아 볼 생각을 하면 된다. 기대할 만할 본편이 반드시 있기를. 기대했던 바를 천천히 이루어 나갈 수 있기를 오랜만에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