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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리 Mar 03. 2018

물과 사랑처럼, 무형(無形)의 아름다운 동화

-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리뷰 -

나와 다른 대상을 만났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갈래로 나뉜다. 대상을 더 알아가려고 하거나, 그 대상을 배척하거나. 전자는 쉽지 않은 길이다. 다름은 무지를 수반 하며, 무지는 두려움을 동반한다. 두려움을 이겨낸 후에도 대상에 다가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지난한 과정이다. 그럼에도 몇몇 사람들은 쉬운 배제보다, 쉽지 않은 이해를 선택한다. 그 고단한 길 너머 ‘이해’가 주는 기쁨 때문이다. 다름을 이해하게 될 때, 나 자신도 다름으로부터 이해받게 된다. ‘셰이프 오브 워터’는 극단의 두 갈래 길 사이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할 방향을 일러주는 우화다.     





영화의 주인공 엘라이자는 농아다. 들을 줄 알지만 말하지 못한다. 이유는 모른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릴 적부터 있었던 목덜미의 상처가 그녀가 가진 유일한 유년의 흔적이다. 하지만 영화는 엘라이자를 쉽게 동정하지 않는다. 그녀는 매일 저녁 9시 알람에 맞춰 일어나고, 여느 사람들이 그렇듯 계란을 삶으며 출근을 준비한다. 목욕을 하면서 은밀한 즐거움을 느끼고, 음악 소리에 맞춰 발을 굴릴 줄 아는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삶에는 자신의 일상과, 일, 즐거움이 생활에 온전히 자리 잡고 있다.    


 



그런 그녀의 일상에 낯선 생명체가 들어온다. 미국과 소련의 우주 개발 경쟁이 한창이던 냉전시대. 미 항공 우주 연구센터에서 청소 노동자로 근무하던 엘라이자는 수조에 갇힌 괴생명체에게 호기심을 갖는다. 둘은 닮았다. 말할 수 없으며, 세상의 일반적 기준에 온전히 녹아들지 못하는 소외된 존재들이다. 둘 사이에는 언어 대신 몸짓과 눈빛이 자리한다. 계란을 나눠먹으며 엘라이자가 괴생명체에게 ‘계란’을 수화로 설명해주지만, 그들의 관계가 진전될수록 언어는 부가적인 역할은커녕 그 필요성이 사라진다. 음악을 들려주고 춤을 추며,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손을 맞대는 모든 교감에서 언어의 빈자리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의 사랑은 지칭할 수 없고, 형언될 수 없는 무형(無形)의 것이다.     


 주류 사회에서 벗어난 존재는 비단 두 사람뿐만이 아니다. 엘라이자의 가장 친한 동료인 젤다는 흑인이며, 그녀의 이웃 자일스는 동성애자이고, 영화의 후반에 디미트리는 소련 출신의 외국인이다. 모두 미국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소외자들인 셈이다. 이 영화를 동화처럼 만들어주는 요소 중 하나는 이들의 연대다. 연구센터에서 고통받는 괴생명체를 구하기 위해 네 사람이 한 마음 한 뜻으로 힘을 합쳐 탈출 계획을 성공시키는 순간이 그렇다. “이름도 계급도 없는” 이들의 연대는 물처럼 정형되지 않은 인류애의 또 다른 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모든 로맨스극이 그렇듯, 이들의 사랑과 연대에도 훼방꾼이 있다. 상류층 백인 남성인 스트릭랜드. 그는 주류 사회의 정점에 속한 사람이다. 이를 본인도 잘 알고 있는 그는 자신이 “신과 가장 가까운 모습”이라고 믿으며, 자신이 생각하는 신의 모습과 멀리 있는 이들을 멸시한다. 스트릭랜드가 상정하는 세계에 무형(無形)의 존재란 없다. 신의 존재부터, 그 자신이 성애하는 침묵. 그리고 녹색과 청록색의 차이를 강조하며 자기가 새로 산 차의 색깔이 ‘청록색’ 임을 강조하는 것까지. 정형돼 있으며 배타적인 스트릭랜드의 언행에는 자연스럽게 인종차별주의자, 성차별주의자의 태도가 묻어난다.     





영화의 제목, 비 내리는 창가, 괴생명체가 살고 있는 수조. 영화의 주요 제재인 물은 따로 형태가 없다. 무형(無形)이기에 언제, 어디에든 존재하며 무엇과도 부드럽게 어울릴 수 있다. "당신의 모양을 알 수 없어요. 내 주변엔 온통 당신뿐."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흘러나오던 오래된 시처럼,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람이 언제 어디서든 내 곁에 있는 것처럼 느끼기 위해선 물처럼 정형되지 않은 사랑이라야 가능하다. 사랑의 형태를 재단하고, 사랑의 모양은 이래야 한다고 단언하는 순간, 사람은 내가 정한 경계 밖의 사랑을 배척하게 된다. 그 지점에서 모든 차별과 폭력이 시작된다. 스트릭랜드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결국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렇게 말하는 듯하다.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다. 그것이 ‘당신’이라면. 마치 물처럼 언제 어디서든 존재하는 사랑의 힘은 엘리이자의 유년의 상처까지 ‘아가미’라는 새로운 생명의 시작으로 승화시킨다. 배척이라는 쉬운 길을 걸어간 사람들은 결코 볼 수 없는, 그들만의 행복이다. 아름다운 동화의 해피엔딩은 쉽지 않은 ‘이해’의 길 끝에 펼쳐져 있었다. 영화는 우리에게 부드럽게 전한다. 그 이해는 정형이 아닌, 무형에서 시작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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