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키요에와 자포니즘 그리고 반 고흐
같이 수업을 듣던, 내가 관심 있던 분과 영화를 봤다. 영화는 재미있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연히 그녀의 핸드폰 바탕화면이 내 것과 같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그림은 반 고흐의 그림이었다. 하늘색 바탕에 흰 꽃이 피어 있는 나뭇가지 그림이다. 그 그림이 무엇을 그린지는 모르지만, 그냥 좋아서 핸드폰 바탕화면으로 저장했다. 같은 화면인 것을 보고는 반가워서 그녀가 말을 걸었다.
"이 나무가 무슨 꽃인지 알아요?"
"매화꽃?"
"아... 네...(실망)... 그럼 이게 일본 그림의 영향을 받은 거 알아요?"
"아 그런가요?"
"우키요에라는 그림 양식에 영향을 받은 거예요."
"우끼요에요?"
"우끼 아니고 우키요."
"아 네, 우키군요.."
"그게 뭐가 웃겨요?"
"아니요. 우키라고요."
"네? 왜 내가 웃겨야 하는데요?"
그렇게 잘 안됐다. 왜 나는 고흐의 그림을 보고 당연히 그것이 매화 그림이라 생각했을까? 사실 이 그림에 있는 꽃은 아몬드 나무 꽃이다. 평생 살면서 실제로 아몬드 꽃을 본 적이 없다. 내가 아는 식물 중에 그 그림의 꽃과 가장 비슷한 것은 매화이다. 그림도 한국이나 일본의 매화도와 구도나 꽃의 모양이 비슷했다. 그때의 상황을 생각하니 얼굴이 붉어진다. 너무 부끄럽다. 내가 얼마나 무식하게 보였을까?
그러고 보니 고흐의 그림 중에 일본 그림을 따라 그린 그림이 있었다. 정말 고흐는 일본 그림에 영향을 받은 것일까? 그때 뭐라고 했지? 우끼...뭐였었나? 아, 맞다. 우끼가 아니라 우키요에다. 우키요에와 고흐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알아봐야겠다.
우키요에(浮世繪)는 일본의 다색 목판화이자 풍속화를 의미하는 고유 명사이다. 우키요에의 우키요(浮世)는 '덧없는 세상, 허무하고 근심스러운 세상'이라는 뜻이다. 이는 근대 이전 전쟁과 가난에 시달리던 일본 서민들의 불교적 인생관의 영향을 받아 현실 세계에 대한 염세적 시각을 반영한다. 근세에 이르러 사회가 안정되면서 점차 현실의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가자는 분위기로 변하게 되었고, 시대 풍조를 따라 화가들도 종교적 색채가 짙은 그림보다는 현실의 장면들을 그리게 되었다. 이러한 그림들을 우키요에라고 불렀다.
이 우키요에는 비싼 값어치를 인정받는 예술품보다는 대중들이 쉽게 접하고 즐길 수 있는 인쇄물에 가까웠다. 목판화이기에 동판화나 석판화에 비해 비교적 자유로운 방법으로 빠르게 표현이 가능했고, 대량 생산이 가능했다. 그렇기에 풍경화나, 유명 인물들의 초상화, 그리고 춘화가 주를 이뤘던 작품이다. 이러한 우키요에는 포장지로 사용될 정도로 저렴하고 쉽게 구할 수 있는 그림이었다.
이 우키요에는 일본과 독점 무역을 벌이던 네덜란드 상인들에게 먼저 전해졌지만, 본격적으로 유럽에 전해진 것은 아무래도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기 6년 전인 1862년의 런던 만국 박람회 이후부터이다. 당시 유럽은 동판화나 석판화가 주를 이루고 있어, 흑백의 판화만이 제작 가능한 시대였다. 우키요에 목판화는 유럽의 기존 판화들에 비해 상당히 섬세하고 다채로운 표현이 가능했다. 특히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 이후 런던과 파리를 시작으로 일본 미술을 취급 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작품을 수집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특히 프랑스의 수집가와 화가들 사이에서 우키요에에 대한 관심이 가장 컸다. 1870년에서 80년에 걸쳐 ‘자포네즈리’, 즉 이국취미가 발생하였고, 그 흐름에 따라 일본의 우키요에에 대한 이해수준도 또한 높아졌다.
우키요에 화가들은 권위적인 전통적 미술의 방식에 구속되지 않고 시장성을 추구했다. 그들은 새로운 표현 방식을 도입하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들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방식인 부감 구도를 사용하고 있던 일본의 회화 방식에서 탈피, 서양의 그림에서 습득한 원근 묘사를 응용하여 다양한 구도를 선보였다. 또한 그들은 간결한 외곽선과 밝은 색면으로 그림을 그렸다.
당시의 유럽 화가들은 다양한 시점의 원근법을 실험하고, 전통적인 화면 질서와 주제를 벗어나려는 욕구가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우키요에는 새로움을 추구하게 만들었으며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유럽의 화가글은 우키요에를 즉각 수용하였고, 재 창조해내는 과정에 이르렀다.
1867년 파리 만국 박람회 이후에, 파리에 있던 당시의 예술가들은 우키요에를 수집하고 연구하고 있었다. 우키요에의 주제는 에도의 서민들의 입맛에 맞춘 것으로, 상품으로써의 생산이 아닌 개인주의적 예술 창조를 추구하고 있던 유럽의 화가들의 주제와는 조금 달랐다. 따라서 그들은 단순히 우키요에의 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모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각자의 작품에 맞는 것들을 선택하여 흡수하였다 그 대표적인 화가들이 에두아르 마네, 제임스 휘슬러, 모네, 드가 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