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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술호근미학 Jul 05. 2018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

나를 찾아가는 중간 항로, 융 학파,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

도서관에 갔다가 흥미로운 책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 아직 마흔은 아니지만, 내가 누군지 모른 채 마흔이 된다면 그때의 상황들은 굉장히 혼랍스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누군지는 지금부터 알면 좋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그 책을 대여했다.

저자인 제임스 홀리스(James Holis)는 미국 융학파의 대표 격인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는 칼 융의 정신분석학 이론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마흔이 되었을 때 나타나는 괴리감과 문제를 분석하고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불혹에 찾아오는 위기감


누군가는 불혹엔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다. 결혼도 하고 안정적인 직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중년들은 배우자에 대한 환상이 사라져 바람을 피우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하겠다고 갑자기 회사를 그만둔다. 이전까지는 사회의 시스템 속에 잘 융화되어 굴러오던 나 자신이 여유가 생기고 나니 그 굴레를 벗어나고자 하는 그런 모습이다.

저자는 이러한 마흔의 위기감은 대부분 내면의 자기감과 후천적으로 획득한 성격의 불균형이 너무 커진 탓이라고 진단한다. 그의 따르면 나의 내면에 자리한 ‘자아’는 사회제도에 의해 생겨난 ‘후천적 성격’에 의해 가려진다. 개인은 태어나 사회제도라는 것과 부딪히게 된다. 이 사회제도에서 오는 문제들을 해결 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투사하지만 그것은 내면의 자아의 활동이 아니어서 나와 괴리감을 갖는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전지전능하다고 믿는 부모에게 자신의 불안을 투사하곤 한다. 부모를 떠나고 나면, 지식과 권력을 사회제도와 권위자, 그리고 사회화된 역할에 투사한다... 어떤 이는 자신의 역할이 곧 자신이라고 믿기까지 한다. 겸손한 이는 자신의 불확실성을 더욱 인식하며, 중간 항로에 들어선 이는 자신의 투사가 무너지는 경험을 한다. -56p-


중간 항로


하지만 그 투사들이 소용없음을 깨닫고 나면, 내면의 자아와 후천적 성격 사이의 불균형이 커지게 된다. 그 결과는 투사가 보상할 수 없을 정도의 커다란 고통으로 연결된다. 이에 후천적 성격의 아래에 숨겨져 있던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인 ‘중간 항로’가 마흔에게 찾아온다. 이 중간 항로는 다른 사람의 의한 것이 아닌 나의 내면에 있는 나와의 만남이다.



자신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여야 하고, 다른 사람의 길이 반드시 내 길은 아니며, 우리가 찾아 헤매는 것은 결국 바깥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오직 우리 자신의 내면에서만 우리는 영혼이 주는 격려를 느낄 수 있다. -250p-


이 중간 항로의 과정에서 나를 얽메고 있던 사회 제도와 가정에서 발생된 콤플렉스, 그리고 부모를 비록 한 타인의 투사로부터 벗어나면 그때 비로소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저자는 다른 사람의 삶을 따라가면 존재를 인정받고 삶의 의미를 찾아낼 것이라는 가정이 깨어지는 순간 느껴지는 배신감과 공포 때문에 중년의 위기가 찾아온다고 주장한다. 타인의 프로그램은 본인에게만 적용될 뿐 나에게 적용될 수가 없다.


중간 항로는 그동안 축적했던 내면화된 경험의 총합과 나 자신을 분리시키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통해 타인과의 관계에서 의존성을 탈피하고 자신에게 더 많은 질문을 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경력, 애정관계, 권력, 만족에서 새로운 자리를 찾기 된다. 저자는 이것은 단순히 외부에서 입은 손실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결혼, 부모, 직장....역할


저자는 사회제도와 관념들이 누군가에게는 폭력으로 다가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중에서 성인들에게 대표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은 바로 결혼, 부모, 직장이다. 이 세 가지에 대한 사회의 역할 요구는 앞서 살아간 위인들에게 향해 있다. 우리는 누군가의 삶을 보면서 이러한 남편과 아빠가 되어야 하고, 이러한 직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미리 가정한다. 하지만 타인을 통한 투사가 내면의 자아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결국 가정과 직장에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저자는 이런 순간이 중년에 찾아온다고 주장하지만, 서른즘인 내 주변 사람들은 이미 중간 항로를 겪고 있다. 가정과 사회가 제시했던 모범답안들이 더 이상 내 인생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자아의 소리에 기울이는 그런 시간 말이다.

 

얼마 전 취업 준비를 하는 졸업생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뇌구조를 그리고, 요즘에 가장 관심 있는 분야가 무엇인지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그녀는 항공승무원을 준비하며, 요즘 토익 공부에 가장 관심을 쏟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안타깝게 그녀의 머릿속에는 자신을 위한 여가시간이 전혀 없었다. 사회가 그 나이에게 요구하는 ‘역할’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역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역할과 자아가 부딪히게 되면 상처가 날 것이다. 그리고 그 상처는 보상받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어떠한가? 나 또한 역할에 얽매여 있진 않은가? 내가 옳다고 믿는 방법이 내 자아와 부딪히지는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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