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시대 단순히 '어떠한 기술에 능한 자'들로 평가받던 예술가들의 지위가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면 '창의적 활동을 통해 신적인 진리와 인간 보편의 지혜를 전달하는 자'들로 격상된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데에는 르네상스 당시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적들이 많이 읽히고, 연구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르네상스의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플라톤이 어떤 것을 주장했고 이것이 어떻게 연구, 해석되어와서 르네상스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대학교 신입생 시절, 필수 교양과목에서 서양의 철학을 아주 간단하게 배운 적이 있다. 처음 소개된 철학자는 바로 플라톤이었다. 당시에 교수님은 플라톤을 '감각 너머의 세계인 지성과 이데아를 지향하고,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가진 철학자'로 소개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앞서 말한 단 한 문장만으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 르네상스 시대까지 예술과 과학에 큰 영향을 끼친 그의 철학을 설명하기에는 한참 모자란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에 시간이 조금 걸려도 플라톤을 미학적인 측면에서 설명해야겠다.
플라톤을 이해하기에 앞서, 먼저 그가 바라보는 인간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플라톤이 주장하는 모든 것은 인간관에 입각하여야만 이해가 될 수 있다. 왜 형이상학적인 인식을 주장했는지 또한 그의 인간관을 이해하지 않으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소개하고자 하는 내용은 영혼 불멸성이다.
플라톤은 영혼은 불멸한다고 주장한다(Phaedr. 244c). 그는 『파이드로스』에서 이 불멸하는 영혼을, 한 멍에에 메인 두 마리의 날개 달린 말과 이를 모는 마부의 모습과 닮았다고 이야기한다(Phaedr. 246a-b). 이 영혼은 혼이 없는 모든 것을 돌보고 우주 전체를 관장하는 위대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날개의 깃털을 잃은 말들은 추락하여 인간의 몸을 입게 된다.
“그리하여 혼이 완전하고 날개가 나 있으면, 드높은 하늘을 가르며 우주 전체를 관장하지만, 깃털이 빠진 혼은 쓸려 다니다가 단단한 뭔가를 붙잡아 거기에 정착하여 흙으로 된 몸을 취하고, 몸은 혼의 능력 덕에 자신이 자신을 움직이는 것처럼 여겨져, 혼과 몸이 달라붙은 전체가 살아 있는 것이라 불리며, 사멸하는 것이란 명칭을 얻었지.”(Phaedr. 246c)
플라톤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현재 영혼이 몸이라는 곳에 정착하여 있는 상태이다. 그렇기에 본래 혼이 없는 모든 것을 돌보고 우주 전체를 관장하는 영혼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이 영혼은 결국 몸을 벗어나, 다시금 상승해야 한다. 그것이 영혼의 본래 역할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추락한 영혼이 다시 날아 올라 신들의 영역에 이르게 하는 것이 날개의 역할이라 주장한다. 이 날개들은 생성되기도 하고 쇠퇴하여지기도 한다. 날개들을 생성하게 하는 것은 바로 아름답고, 지혜롭고 훌륭한 것들이며, 날개를 쇠퇴하게 하는 것은 추한 것들이다. 플라톤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힌다.
“본래 날개의 힘은 무거운 것을 공중으로 올려 신들의 종족이 사는 곳으로 이끌어 올리는 것으로, 어떻게 보면 육체와 관련되는 것들 중에서는 신적인 것에, 즉 아름답고 지혜롭고 훌륭하며, 그 밖의 모든 그러한 신적인 것에 가장 크게 관여하지. 바로 이것들에 의해서 혼의 깃털이 가장 많이 양육되고 자라며, 그것들과 반대되는 추하거나 나쁜 것 등에 의해서는 쇠퇴하고 소멸하지(Phaedr. 246d-e).”
플라톤은 결국 인간의 몸에 머물고 있는 영혼의 날개는 아름답고, 지혜롭고, 훌륭한 것들을 통해 생성되고, 그 날개들은 결국 영혼을 신적인 수준, 즉 선(善)에 이르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 아름답고, 지혜롭고, 훌륭한 것들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플라톤은 후기 저작들에서 선을 상기하는 최초의 방법은 바로 감각적 지각이라고 주장한다.
누군가가 보거나 듣거나 또는 다른 어떤 감각적 지각을 갖게 됨으로써 무언인가를 지각하게 되면, 이로 해서 그가 잊고 있던 다른 무엇인가를 생각해 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 점이 실은 밝혀졌기 때문이네. 이것이 관련되는 그것과는 닮은(유사한) 것이 아닐 수도 있고 또는 닮은(유사한) 것일 수도 있네. 그러므로 내가 말하듯, 다름 둘 중의 어느 하나일세. 우리 모두가 이것들을 어쨋든 알고 있는 상태로 태어나 일생을 통해 알고 있거나, 또는 우리가 배우는 걸로 말하는 사람들이 나중에 상기를 하게 될 뿐 다른 아무 것도 하지 않아서, 배움은 상기함이거나 말일세 -『파이돈』.76a
어떤 사람이 이곳에 있는 아름다움을 보면서 참된 아름다우을 상기한다면 날개가 돋고, 날개가 돋으면 솟구쳐 날고 싶은 바람을 갖지만 능력이 없는 탓에 새처럼 위를 바라보면서 아래 있는 것들에는 아무 관심도 주지 않는데 바로 그런 이류 때문에 그는 광기에 사로잡혀 있다는 말을 드는 걸세 (Phaedr.249d)
아름답고, 지혜롭고, 훌륭한 것들 중 감각적 지각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단연코 자연일 것이다. 그런데 어느순간부터 자연이라는 것은 연구의 대상이 되어 버리고,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는 그 자리를 예술이 선을 상기할 수 있는 아름다운 것으로 대체 된다. 이에 따라 예술가의 지위 또한 격상하게 된다. 도대체 고대의 그리스에서는 '어떠한 분야에 숙련된 지식과 기술을 가진자들'로밖에 인정받지 못하던 예술가들이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서는 아름답고, 지혜롭고, 훌륭한 것들을 표현하여 선에 이르게 해주는 존재들로 지위가 격상할 수 있게 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