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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술호근미학 Jan 01. 2019

우리는 '좋아요'의 시대를 산다

예술이 지금 시대에 필요한 의미, <스윙키즈>를 보고

우리는 ‘좋아요’의 시대를 산다. 지금의 시대에는 자신의 일상이나 사상을 영상으로 찍어 Youtube나 Instagram과 같은 SNS에 올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것들의 제작 목적은 ‘좋아요’를 받기 위함이다. SNS의 구독자들은 보기에 좋은 영상이 아닌 것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SNS의 알고리즘은 구독자의 행동을 분석하여, 그들이 ‘좋아요’를 누를만한 영상들을 소개해준다. 그렇게 구독자가 보는 화면들과 영상들은 본인이 만족할 만한 것들로만 채워진다. 이런 현상들이 지속되면 결국엔 데이터에 의해 분석된 자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만 보게 된다. 저항이나 어려움 없이 내 입맛에 맞는 어떠한 동일한 흐름에 뒤덮인다. 그것은 디지털 나르시시즘이다. 타인이 어떠한 소리를 하는지에 대한 관심은 없다. 다만 내가 보기 좋아하는 영상만을 볼뿐이다. 나의 사유의 폭은 점차 좁아지고 그것은 결국 사유의 중지를 불러온다.

 

인간은 익숙해지고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서는 사유하지 않는다. 어린아이는 태어나 처음에는 부모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때에 부모가 안아주려 하면 저항하고 울음을 터뜨리지만, 부모를 인식한 후에는 부모의 품에서 어느 곳과는 비교할 수 없는 평온함을 갖는다. 그 품 안에서는 어떠한 저항도 없으며 사유도 없다.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신체적으로 가까울수록 사유는 점차 일어나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의 신체 일부에 대해 사유하지 않는다. 내 손의 존재에 대해 사유하지 않는다. 사유를 위해서는 거리가 필요하다. 이 시대의 영상들은 어느 때보다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다가온다. 내 손바닥 위에 놓여 있는 휴대폰을 통해 영상은 나에게 다가오고, 소리는 귀에 꽂힌 이어폰을 통해 여과 없이 직접적으로 들려진다. 내가 차마 거리를 갖기도 전에 다가오는 이 영상과 소리들은 폭력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뺏어간다. 다만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즐거움에만 몰두하게 한다.

‘좋아요’의 영상들은 사유를 중지 키며, 타인과의 소통을 단절시킨다. 결국 자신과 사회에 대한 비판도 없어진다. 내가 좋아할 만한 영상들은 끊임없이 업데이트된다. 이것은 자신만의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스스로를 감금한다.


 자기 자신과 직면하고,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옳은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동일성에서 벗어나면서부터 시작된다. 이 비동일성은 자연미로부터 얻어진다. 아도르노는 “자연미는 보편적 동일성의 속박 속에서 사물들이 지니는 비동일적 요인의 흔적이다” 고 주장했다. 자연미를 통해 자신의 유한성을 깨닫고, 나를 해체할 수 있는 경험을 한다. 이것은 ‘좋아요’의 영상들과는 다르게 산만하고, 예측이 불가능하다. 이것은 익숙하지 않은 것이기에 쉽게 이해할 수도 없으며, 그렇기에 당연히 고통을 수반한다. 이 익숙하지 않은 자연미는 마치 암호와 같다. 가장 자연스럽다고 생각되는 것이 아직 존재하지 않고, 가능한 상태로만 여겨진다. “자연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의 형상은 역으로 아직 존재하지 않은 것, 혹은 가능한 상태에 대한 암호이다”.  예술은 이 자연이 가지는 소통 방식을 모방한다. 예술과 자연미는 비동일성의 사유를 갖게 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즉 예술은 동일성의 논리에 살고 있는 주체들에게 비동일성의 사유를 통하여 대상에 대한 일반적이고 보편적이던 사유를, 개별적이고 특별하게 만든다.


 이것에 대해 얼마 전 보았던 ‘스윙키즈’라는 영화가 생각이 난다. ‘스윙키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전쟁이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을 무렵, 미군은 거제도에 포로수용소를 만든다. 그들은 북한의 전쟁포로들을 그곳에 수용시키고 사상교육을 통해 그들을 교화시키려 한다. 그리고 이를 언론에 알려 소련과의 이데올로기 전쟁에서 승리하려 한다. 하지만 실상 거제도는 각각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두 무리들로 나뉘어져 그들끼리 싸우고 있는 형색이었다. 이 가운데 새로 수용소에 부임해 온 소장은 수용소의 대외적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전쟁 포로들로 미국의 춤인 탭댄스 댄스단을 결성하는 프로젝트를 계획한다. 주인공인 로기수는 소련에서 무용교육을 받은 사회주의 신봉자인데, 어쩌다 보니 이 탭댄스팀에 합류하게 된다. 미국의 것을 먹고, 행하는 사람들을 ‘반동분자’라 부르던 그는 자면서까지 스텝을 밟을 정도로 탭댄스에 흠뻑 빠지게 된다.


로기수는 탭댄스를 추는 순간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는 함께 춤추는 사람들이 자본주의자이든, 미국인이든, 피부가 하얗건 까맣건 신경 쓰지 않는다. 그의 사회주의 동료들은 그를 구타하고, 배신자라고 낙인찍는다. 그럼에도, 로기수는 그의 유일한 영어 대사인 “I just want to dance”처럼 그저 춤추기를 갈망한다. 탭댄스로 인해 로기수는 자신을 거리를 두고 지켜볼 수 있게 된다. 그러면서 과연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이념 대립이 언론과 공동체에서 이야기하는 만큼이나 중요한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게 된다. 탭댄스라는 행위는 로기수를 사회주의 공동체의 인민이냐 아니면 자본주의의 시민이냐 하는 동일성에서 개별자로 분리시켰다. 아도르노가 이야기하는 예술의 역할인 비동일성의 사유가 발휘되었다. 로기수는 탭댄스에 미메시스적 충동을 갖게 되었고,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

이것은 단순히 이념 대립이 심하던 5, 60년대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좋아요’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도 예술은 우리에게 미메시스적 충동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비동일성의 사유를 가능케 한다. 익숙하지 않은, 무엇인가 불편함을 주는 예술은 주체로 하여금 스마트폰과의 잠시지만 단절을 일으킨다. 이를 통해 주체는 잠시나만 거리를 두고 자신에 대한 인식을 한다. 그리고 이 행위가 반복되면 진지하게 그 행위 자체에만 집중하게 된다. 이를 통해 나에게 매끄럽게만 다가오던 것들이 아닌 것들과의 화합을 경험한다.


‘좋아요’의 시대에서 예술은 스스로의 감금에서 탈출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익숙하지 않은 것, 불편한 것, 은폐된 것들을 경험함으로 주체는 타인과 소통하고 사회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갖게 만든다. 그러한 점이 이 시대 예술이 가지고 있는 힘이며, 예술을 접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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