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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술호근미학 Jun 24. 2019

믿는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는가? '칠드런액트'

나는 내 믿음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었다.

나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태중에 있을 때부터 신앙을 가졌다고 하여 '모태신앙'이라고 불리었다. 일요일에 교회를 가는 것은 나에게 당연하게 여겨졌다. 신이라는 존재를 거리낌 없이 아버지라고 불렀다. 나에게 신앙은 말과 같았다. 코끼리를 코끼리라고 부르는 것은 나의 어머니가 그렇게 부르기 때문인 것처럼 나는 나의 어머니가 신앙을 갖기에 아무런 의심 없이 신앙을 가졌다.


그러던 내 신앙에 질문을 갖게 된 것은 내가 6학년 때, 나의 어머니가 교회를 나가지 않으면서부터이다. 집안이 어려워지고 새벽에 식당으로 일을 나가시는 바람에 어머니는 교회를 더 이상 나가지 않으셨다. 나는 형과 함께 교회를 다니기는 했지만 어머니가 교회를 다니지 않는 것을 보고, 교회는 빠질 수도 있는 거라 생각했다. 그러다가 교회를 다니지 않았다.


교회를 다시 다니게 된 것은 중학교 때이다. 청소년 시절 나는 나름대로 굉장히 진지하고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교회의 율법을 잘 지켰으며 내 시간과 돈을 들여 교회를 위한 봉사도 많이 했다. 그러던 와중에 교회에 있던 목회자와 리더들이 부도덕한 행위들을 저질렀다. 그들은 그들이 말하는 대로 살아가지 않았다. 그걸 보고 있자니 내가 정말 내가 원해서 신이라는 존재를 믿고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갖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나의 부모님이 아버지라 부르는 신을 나는 왜 할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아버지라 부를까?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는 교회의 율법을 따르고 싶지 않은데 속해진 공동체에서 이방인 취급을 당할까 두려워 잘 따르는 척했던 나의 모습을 발견했다. 내가 '믿습니다' 고백했던 것은 나의 부모님과 교회 목사님이 주입해온 것들에 대한 대답이었지 나의 판단과 선택은 아니었다.


믿어왔던 것들의 배신

대부분의 모태신앙을 가진 기독교인들은 내가 겪었던 것과 같은 상황에 직면할 때가 온다.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것들이 이성이나 도덕, 사회 체제와 부딪힐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작게는 지하철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지옥 갈 거니 빨리 예수 믿으라며 전도하는 기독교인들도 있고, 크게는 종교 때문에 병역을 거부하고, 공무원이 자신이 맡은 지역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망언을 할 때도 있다. 그것들은 도덕적으로는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법적으로는 범법에 속한다. 그들은 진정으로 자신의 판단과 선택으로 도덕과 사회체제를 따르지 않는 것인가?


종교라는 '믿음'의 대표적인 상징을 들었지만 이것은 비단 종교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 또한 내가 어디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들 중 하나이다. 이거들 또한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무너지는 어느 한순간이 있다. 검증과 고민없이 받아들이는 믿음들에 대해 의문점을 갖게 되고, 그것에 저항하는 과정을 아주 흥미롭게 그린 작품이 있다. 그 작품이 바로 '칠드런액트'이다.


칠드런액트

피오나는 영국의 판사이다, 그녀는 일에 있어 완벽 추구자이다. 집에 와서도 일에 너무나도 매진한 나머지 남편에게 소홀하게 된다. 이에 지친 남편은 그녀에게 부부관계의 심각성을 이야기한다. 심란한 마음을 갖고 있던 그녀는 어느 날 백혈병에 걸렸으나 종교적인 이유로 치료를 거부하는 17세 소년 애덤의 사건을 담당하게 된다. 병원은 17세의 소년은 미성년자이기에 ‘칠드런 액트(The Children Act)’, 즉 법정이 미성년자와 관련한 사건을 판결할 때 아동의 복지를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함을 명시한 영국의 유명한 아동법에 따라 수혈을 동반하는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환자인 애덤 본인과 애덤의 부모님은 수혈이 종교적인  신념에 반하기에 이를 완강히 거부한다. 치료를 하지 않으면 3일 이내에 애덤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기에 피오나는 빠르게 판결을 내려야만 했다. 이전과 같은 판례에서는 칠드런 액트 법에 의해 당연히 병원 측의 주장을 들어주지만, 이례적으로 피오나는 그 소년을 직접 만나겠다고 한다.

피오나는 병실에 누워 있는 애덤을 만난다. 그녀는 그곳에서 애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그가 연주하는 기타 반주에 예이츠의 시를 노래로 만든 아일랜드 민요 '샐리가든'을 부르기까지 한다. 그리고 곧바로 법원으로 돌아와 '칠드런 액트'법에 의거하여 애덤에게 수혈을 동반한 치료를 허가하는 판결을 내린다. 그렇게 애덤은 수혈을 받고 회복한다. 때마침 외도했던 남편 또한 집으로 다시 돌아온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잘 흘러가는구나 싶은 그때, 피오나는 출근길에 누군가가 자신을 따라오는 것을 느낀다. 그녀는 뒤돌아 보았고 깜짝 놀라게 된다. 그녀를 따라오던 것은 바로 애덤이었다.   


영화는 먼저, 애덤을 보여준다. 애덤은 그동안 당연하게 가져왔던 믿음이 무너짐에 때라 무력감을 느끼고, 자신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다. 그는 병상에서 '왜 수혈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라는 피오나의 질문에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마음으로 알 수 있다'라고 답한다. 살인이나 강간 방화 등이 나쁜 것이라는 걸 당연하게 아는 것처럼 수혈은 당연히 나쁘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그의 종교적 신념에서 비롯된 대답이다. 그러나 수혈을 받고 병에서 회복하고, 그 과정에서 피오나와의 대화 그리고 노래를 불렀던 경험을 통해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이 당연하게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제 그는 피오나를 의지하며 자신의 삶을 바꾸고자 노력한다.

그런가 하면 피오나는 이례적인 일들을 시도해본다. 이성적이고, 법을 가장 잘 알고 있는 피오나는 상식적이지 않은 일들을 시도한다. 사건의 당사자인 애덤을 만나고 그의 연애편지를 받는 등의 행동들이다. 그녀의 이례적인 행동들은 불안하고 격해진 감정상태에서 일어난다. 언제나 자신의 곁에서 좋은 남편으로 남아있을 거라 믿었던 잭의 외도가 그녀의 삶을 흔들어 놓았다.


상식의 구멍

두 사람은 각기 서로가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것들이  무너짐에 따라 새로운 판단들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봉착했다. 그 상황 가운데서 그들은 각기 서로가 믿고 있는 '상식적'인 선에서의 선택을 하려 한다.  상식이라는 것은 사전적인 의미로 '보통사람이 가지고 있는, 또는 가져야 할 지식이나 판단력'을 뜻한다. 그러나 이 상식이라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12세기 종교재판에서는 죄의 중함을 부력으로 판단했다. 죄인을 물에 빠뜨려 떠오르면 유죄, 가라앉으면 무죄라는 것이다. 이는 당시 대주교의 '진실을 숨기려는 자는 울에 빠뜨렸을 때 하나님의 음성 때문에 가라앉을 수 없다' 라는 주장에 근거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터무니없는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이것이 진리이며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 상식은 시대가 흐르면서 사람들을 배반하였다. 마찬가지로 몇 세기가 흐른 뒤에 현재의 법을 본다면 정말 터무니없는 법들도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상식이라고 믿는 것들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구멍들이 존재한다. 


치열한 고민과 판단, 선택

나는 신앙에 흔들림을 가진 이후, 아이러닉 하게도 대학에서 기독교 교육학을 전공했다. 내가 믿고 있던 것들이 정말로 옳은 것인가?를 알아보고 싶었다. 교수님들을 만나 내가 믿어왔던 것들과 교회에서 주장하는 것들에 대해 반대 의견을 제시하며 치열하게 싸워보았다. 그 결과 성적은 D를 받았지만, 나름대로 내가 믿어야 하는 것들과 믿지 말아야 할 것들을 분별하게 되었다. 그 치열한 과정이 없었더라면 아마 나는 여전히, 내가 믿었던 것들에 대한 문제점들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그 문제점들 때문에 그것 전체를 부정했을 것이다.

 내가 맹신하던 것들이 현실에서 나를 배반할 때, 나는 그것을 믿게 만든 누군가를 탓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인생은 당신의 것이다. 그렇기에 당신은 스스로에게 책임을 지워야 한다. 당신이 믿고 있는 그 믿음은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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