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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술호근미학 Dec 26. 2019

바바라 크루거 앞에서의 두 번째 허세

You delight in the loss of others

바바라 크루거와 슈프림

2019년 늦가을, 한국에서는 바바라 크루거展이 열렸다.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미대생 동생에게 연락해서 바바라 크루거 전시를 보러 가자고 물었다. 

"바바라 크루거가 누구인데요? 유명한 사람인가?"

바바라 크루거에 대해 설명하면 꽤나 긴 시간이 걸린다. 문자로 전시를 같이 가자고 권유하면서 길게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녀가 바바라 크루거에 관심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짧게 소개해야 한다. 

"슈프림 로고 알지? 그 슈프림 로고에 영감을 준 작가야."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 1945~)는 미국의 이미지와 텍스트를 사용하여, 포스터, 빌보드, 설치 작품 등과 같은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는 미국의 작가이다. 붉은 테두리 안 흑백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빨간 네모 그리고 그 안에 Sans serif 폰트로 쓰인 문구가 있는 작품들이 그녀의 대표작들이다. 그녀는 현 사회에서 일어나는 부조리들을 비롯하여 보편적으로 누구든지 고민해 볼 수 있는 문제들을 작품 속에 제시한다. 그녀는 소비와 시선, 인권, 인종, 성 평등 등에 대한 문제를 제시한다. 이를 통해 관람자는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 환경의 지배를 받아 형성되지는 않았는지 고민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바바라 크루거는 기존 잡지의 사진을 그대로 가져와 흑백으로 바꾸고 그 위에 문구를 집어넣는 식으로 작업을 한다. 이걸 보고 도용이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포스트 모더니즘 작가들은 작품의 결과물보다는 작업 과정과 아이디어의 독창성을 더욱 중요시했다. 그들은 차용, 도용, 혼성모방 등은 표현전략이자 미학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바바라 크루거의 작업은 현재까지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바바라 크루거의 작업 방식은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패션 브랜드 '슈프림(Supreme)'에도 영향을 주었다. 사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바바라 크루거보다는 슈프림을 더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슈프림은 시작부터 바바라 크루거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바바라 크루거 스타일의 로고를 제작하는 한 편, 케이트 모스의 켈빈 클라인 흑백 광고사진에 슈프림 박스 로고를 붙이는 프로모션을 발표하고, 루이비통과 구찌의 패턴을 그대로 차용해 그 위에 슈프림의 로고를 얹는 등 바바라 크루거의 작업 방식을 그대로 따라 했다. 이러한 기행들은 젊은이들을 열광시켰다. 슈프림은 현재 수많은 기업들, 아티스트들과 협업을 하며 현시대 가장 주목받는 패션 브랜드 중의 하나가 되었다.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은 바바라 크루거를 '슈프림 로고에 영향을 준 아티스트'로 기억하기도 한다. 


You delight in the loss of others

Barbara Kruger, Untitled (You delight in the loss of others), 1985 (출처:BBC)

바바라 크루거의 작품들 중 그중에서도, Untitle(You delight in the loss of others)이 이번 한국 전시회에  전시되었다. 이 작품에 쓰인 영어 문장을 직독 직해하면 '당신은 다른 사람의 손실에 기뻐한다'이다. 그림에는 누군가가 컵을 실수로 놓쳐 우유가 바닥에 쏟아지고 있다. 그 위에 바바라 크루거 특유의 작업으로 "You delight in the loss of others"라는 글씨가 있다. 이것만 놓고 본다면 타인이 손실을 일으키는 어떤 특정한  사건에 당신은 즐거워한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굳이 '기뻐했다(delighted)'가 아닌 '기뻐한다(delight)'라는 현재 동사를 사용한 것을 보면 '당신이 기쁨은 다른 사람의 손실로 인함이다'라고 하는 메시지를 주는 듯하다.  


이에 대해 의문이 들 수 있다. 내가 기쁨을 느끼는 것은 내가 금전적, 감정적, 시간적 이득을 취할 때이다. 그런데 바바라 크루거는 다른 사람의 손실로 인함이라고 말한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일까?  


이전에 다니던 교회에는 '노숙자 사역'이라는 봉사활동이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씩 노숙자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는 단체를 방문해 그들의 일을 돕는 것이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가서 노숙자들에게 라면과 김치를 나눠주며 그들이 재기할 수 있도록 돕는 센터에 방문하기를 권유하는 일이었다. 평소에 관심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친구가 권유해 몇 번 그 모임이 참석한 적이 있다. 

노숙자 사역을 하는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함께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친구가 아는 여자 한 명을 데려 왔다. 보아하니 그 친구는  자신이 데려온 여자에게 관심이 있어 보였다. 이것저것 친절히 설명해 주고, 최대한 자신의 착한 모습을 보이려 애썼다. 시간이 되어 우리는 센터를 방문해 먹을 것을 챙겨 서울의 지하철 역으로 갔다. 노숙자 분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던 때에 그 여자는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봉사활동이 다 끝나고, 다음날 나는 그 친구를 만났다. 그리고 그 친구는 자신이 데려왔던 여자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제 그 여자애가 노숙자분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면서 눈물을 흘리더라고, 정말 마음이 착하지 않니? 그분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면서 '자신은 가진 게 많구나' 하는 걸 깨달았대.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부끄러웠대. 정말 괜찮은 여자이지 않니?"


그녀는 정말 괜찮은 아이인가? 첫 번째, 그녀는 자신이 가진 것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두 번째, 그녀는 노숙자들을 보고 비로소 자신이 가진 것이 많다고 느꼈다. 이 말인 즉, 노숙자는 가지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세 번째, 그러므로 그녀는 '노숙자보다는 자신이 가진 것이 많다'는 사실에 감사한 것이다. 자신의 소유보다 덜 가진 노숙자가 없었더라면 그녀는 감사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감사는 노숙자의 모자람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무엇에 기뻐하고 슬퍼하는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인데, 내가 예전에 다녔던 교회의 몇몇 목사들은 '감사'라는 주제의 설교를 했다. 그들은 주제의 소재로써 '최악의 상황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사용한다. 팔다리가 없는 장애인, 가족을 잃은 사람, 치명적인 병에 걸린 사람 등등. 그들은 그 예화들을 통해 '최악의 상황들 가운데서도 최선을 다하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에 비하면 우리가 가진 것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니 우리들도 힘내서 살아보자.'이다. 그 말은 타인의 부족함을 통해 나의 만족을 채우는 행위이다. 그것은 실제로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괜찮다며 스스로 자위하는 행위이며, 남들보다 가진 것이 더 많으니 부족함을 논할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를 제한하는 행위이다. 이것들은 거짓 감사와 슬픔을 제한하는 것이다. 수적인 질서에서 내 손에 있는 숫자가 더 높다고 감사할 수 있고, 그 양이 지금 내가 힘듦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없는 사람들에 비해선 많으니 슬퍼해서는 안된다. 결국 나의 행복과 감사는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통해 채워진다. 감사와 슬픔이 수적인 질서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설교는 '최악의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 비하면 너는 가진 게 많은 사람이니 슬퍼하지 말고, 그들보다 많이 가진 것에 대해 감사하며 살아라.'이다. 그것은 최악의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재물로 삼는 행위인 것이다. 


감정의 주인이 내가 아닌, 사회에서 요구하는 '수'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은 타인의 손실을 내 기쁨의 도구로서 사용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한 가지 생각해볼 법한 문제가 더 있다. 바바라 크루거의 "I delight in the loss of others"를 반대로 생각해보자. 아마도 "I sad in the gain of others"이 될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이익에 슬퍼한다. 우리는 무엇에서 부족함을 느끼는가? 무엇에서 슬픔을 느끼는가? 타인을 대할 때 나는 과연 어떠한 잣대로 그들을 바라보는가? 내 기쁨과 슬픔은 무엇에 대해 좌지우지되는가? 바바라 쿠루거의 작품은 이러한 것들에 대해 한 번쯤 고민해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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