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artory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술호근미학 Jan 02. 2020

<아테네 학당> 그림에 여자 철학자가 있다고?

<아테네 학당> 앞에서 부리는 세 번째 허세, 히파티아

아테네 학당 속 유일한 여자 철학자

<아테네학당> 속 히파티아

바티칸 사도 궁전 내부의 여러 방들 중 교황의 인 서재인 '서명의 방 (Stanza della Segnatura)'이라는 곳이 있다. 이 방의 네 벽면은 각각 철학, 신학, 법, 예술을 주제로 프레스코 벽화가 그려져 있다고 한다. (사실 나도 안 가봤다 아직)  이 중에서 철학을 상징하는 그림이 바로 <아테네 학당>이다. 이 그림은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인 라파엘로 산치오가 교황 율리오 2세의 주문으로 27세인 1509~1510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가운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총 54명의 철학자들이 등장한다. 그중에서 눈에 띄는 유일한 여자이자 유일하게 관람자들과 눈을 마주치는 철학자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바로 히파티아이다. 대체 그녀가 누구이길래 라파엘로는 그녀를 그림에 그려 넣었을까?


세계 학문의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 무사 이움


마케도니아의 귀족인 알렉산더는 청년 시절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헬레니즘 교육과 문화를 접하게 되고, 이에 심취하게 된다. 그는 후에 왕이 되고, 정벌을 통해 제국을 만들어 나간다. 헬레니즘 문화에 푹 빠져있던 알렉산더는 제국의 수도를 토착문화와 헬레니즘 문화가 잘 융합된 도시로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아쉽게도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33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알렉산더 왕이 죽은 이후, 마케도니아 제국은 20여 년의 전쟁 끝에 3개의 국가들로 나뉘게 된다. 알렉산더의 이복형제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친한 친구이자, 그와 함께 아리스토텔레스 문하에서 함께 수학하였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소테르)는 이집트에 정착하여 자신의 왕국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세운다. 그는 알렉산더만큼이나 헬레니즘 문화를 사랑했다. 그는 알렉산더의 염원이었던 제국의 수도를 아테네보다 뛰어난 학문과, 문화 예술, 교역의 중심지로 만들기로 결심한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강한 왕국의 시작은 바로 문화, 예술과 학문에 대한 연구라고 믿고,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함께 왕국의 수도인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무사이움(Musaeum)이라 하는 문화, 예술, 학문 연구 기관을 세운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이 무사이움의 유래는 그리스 신화에서 학예를 상징하는 뮤즈(Muse) 여신에게 봉헌된 사원 무세이온(Mouseion)에서 비롯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 곳에 1000여 명의 뛰어난 예술가, 학자들을 초청해 그들에게 세금이 감면된 월급을 주며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뿐만 아니라 미술품들과 문헌들을 닥치는 대로 수집해주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는 예가 하나 있는데, 그는 알렉산드리아로 들어오는 무든 선박들에게 의무적으로 배에 실린 문헌의 리스트를 제출하게 했다. 그중에 무사이움에 없는 문헌은 기관의 학자들이 필사한 후, 원본은 무사이움에 보관하고 필사본을 주인에게 돌려주었다고 한다. 당대 동서 간 국제 무역의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에는 수많은 배들이 방문했고, 문헌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로 인하여 무사이움 속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세계에서 가장 양질의 문헌들을 많이 수록한 도서관이 될 수 있었다.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기원전 30년 로마에 의해 멸망하게 되지만, 이 무사이움은 로마시대 초까지 학문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무사이움 최초의 여성학자 히파티아

히파티아

히파티아의 아버지 테온은 바로 이 무사이움의 연구원이었다. 그는 20대 중반에 무사이움의 연구원이 된 이후, 연구와 더불어 후학들에게 강의를 하기도 했다. 테온은 기독교가 공인되고 100년이 채 안되어, 히파티아라는 딸을 낳게 된다. 이 히파티아는 무사이움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헬레니즘 문화를 경험하게 된다. 그녀는 수학과, 천문학을 비롯하여 시와 체육에 이르기까지 균형 잡힌 교육을 받는다. 히파티아는 아버지보다도 학문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고, 성인이 된 후 결국 무사이움에서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수학과 신플라톤주의 철학에 대해 연구하고 가르치는 위치에까지 오르게 된다.

그녀는 수학, 천문, 철학 등에서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에 여러 나라의 학자들은 수학적인 난제가 있을 때마다 그녀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녀는 이에 대해 대부분 답변을 해줬다고 한다. 철학적으로도 뛰어난 학자이기에, 알렉산드리아로 들어오는 편지 중 수신인에 '무사 여신에게', '철학자에게'라고 쓰인 것들은 모두 그녀에게 배달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히파티아는 또한 굉장히 아름다웠다고 한다. 수많은 나라의 왕자들과 귀족들은 지성과 미모를 모두 갖춘 이 여인에게 청혼했지만, 그때마다 히파티아는 청혼을 정중히 거절하며 "나는 진리와 결혼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해 히파티아의 명성은 날로 더해져 갔고, 명실상부 히파티아는 무사이움의 지도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녀는 학문적 기구의 수장이면서, 많은 시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또한 많은 지도 계급들은 자신의 자식들을 히파티아에게 보내어 공부하게 했다. 이 제자들은 후에, 정치인들이 되고 자연스럽게 히파티아는 정치적 영향력까지 갖추게 된다.


정치 싸움, 그리고 기독교와의 대립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끝나고, 기독교가 하나의 종교로 인정되기 시작한다. 이에 일반 시민들을 비롯해, 사회 고위계층들 내에서도 하나둘씩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늘기 시작한다. 헬레니즘 문화가 창궐하던 알렉산드리아에도 기독교가 들어오게 되고, 이후에 알렉산드리아는 초기 기독교의 중심적 역할을 했다고 알려질 만큼 기독교가 영향을 많이 미치는 지역이 된다.

문제는 당시의 종교지도자는 정치 권력자와 비슷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합법적인 군대를 소유하지는 않지만, 사병들과 종교의 신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때문에 종교지도자들은 정치 권력자들과의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치 권력자는 폭동을 막기 위하여 종교지도자들의 눈치를 살폈다.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를 고소했고, 로마 소속 통치자인 본디오 빌라도가 그들의 고소를 받아들인 것이 하나의 예이다.

키릴로스 주교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로마 소속 장관인 오레스테스와 기독교의 파송 주교 키릴로스가 권력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오레스테스는 유대인들과 결속하여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죽인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들을 탄압하고 살인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에 대해 기독교 인들은 분노를 표출하고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  

당시 히파티아는 오레스테스와의 친분을 유지하는 한편 그에게 정치적 조언을 하는 조언자의 역할을 했다. 또한 그녀는 신화나 우화, 미신, 그리고 종교에 대해 굉장히 회의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우화는 우화로, 신화는 신화로, 불가사의는 시적인 판타지로 가르쳐져야만 한다.

미신 따위를 진리처럼 가르치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유익한 사람들은 그런 가르침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나서 엄청난 고통을 겪지만, 더 비극적인 것은 결국 그들은 그러한 가르침에 만족함을 느낀다는 점이다.

인간은 살아있는 진리를 위해 그러하듯, 미신을 위해 싸울 것이다. 비록 더욱더 심해진다 하더라도 미신은 막연하고 실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결코 반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진리는 시야의 관점이기 때문에 바뀔 수 있다.
Hypatia by Charles William Mitchell (1885)

기독교인들은 이런 태도를 취하고, 자신들에게 불리한 역할을 하는 히타피아를 증오하였다. 과격한 기독교인 폭도들은 무사이움으로 강의를 하러 가던 히파티아의 마차를 습격한다. 그들은 그녀를 마차에서 끌어내려 머리카락을 다 뽑고 벌거벗긴 후, 날카롭게 간 굴 껍데기, 타일, 깨진 그릇 조각 등으로 피부를 벗겨내는 고문을 하고, 분살했다. 이 과격한 기독교 폭도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히파티아를 마녀라고 모함했다.



마녀에서 철학자로

라파엘로

신기한 것은  라파엘로가 마녀사냥을 당해 죽은 히파티아를  <아테네 학당> 그림 속에 등장시켰다는 점이다. 특히, 라파엘로는 처음에는 이 히타피아를 중앙에 위치시키려 했다. 그러나 만약 히타피아를 중앙에 그리면 어떠한 그림들도 못 그리게 하겠다는 수많은 반대에 의해, 결국 히파티아를 그림의 왼쪽에 그리게 된다. 라파엘로는 그만큼 히파티아를 철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그녀는 5세기 중반 마녀로 죽었음에도 16세기에는 중요한 위치의 철학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까?

첫 번째로 16세기는 르네상스 최고의 전성기였다. (참고: 르네상스가 뭐예요? https://brunch.co.kr/@hogeunyum/113) 르네상스의 중심사상은 바로 신플라톤주의였다. 히타피아는 주로 신플라톤주의에 대해 강의했고, 이에 르네상스 시대로 들어서면서 그녀의 가르침이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두 번째로는 기독교의 권력이 약화되었다는 점이다. 교황청은 이전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이탈리아 도시국가와 부호들의 권력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이에 교황청의 절대적인 복종이 아닌 학문적 연구에 의한 토론을 통해 답을 정하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실 이전의 마녀사냥은 지금 살펴보면 말도 안 되는 기준들로 마녀들을 밝히곤 했다. 예를 들어, 손과 발을 묶은 혐의자를 물속에 담가서 떠오르지 않고 죽으면 마녀가 아니고, 죽지 않고 물 위로 떠오르면 마녀라는 식이다. 이렇게 비이성적으로 벌여졌던 이전의 마녀사냥에 대한 토론도 이어졌고, 히파티아는 마녀가 아닌 철학자였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라파엘로는 신플라톤주의자였을 것이다. 라파엘로는 로마 소속 화가가 아니었다. 그는 1504년 피렌체로 이주하여 자신의 커리어를 시작했고, 피렌체의 다른 예술가들처럼 신플라톤주의를 접했다. 피렌체에서 그의 활동은 명성을 얻게 했고, 교황의 눈에 들어 로마로 초청된 것이다. 당시의 피렌체는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최고의 도시였고, 그 세력은 교황청을 넘어섰다. 이에 피렌체의 예술가들은 기독교를 존중했지만 그에 대해 절대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라파엘로는 먼저 <성체 논의>를 완성한 뒤에, 반대편에 <아테네 학당>을 제작했다.

교회의 승리를 상징하는 작품의 마주 보는 그림에 마녀로 몰려 죽은 히파티아를 그려놓고, 심지어 자신의 모습을 몰래 그려 넣은 것은 어쩌면 교회를 조롱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이러한 연유로, 르네상스 시대 히파티아는 마녀가 아닌 철학자로서의 명예를 되찾게 된다. 종교에 대해 굉장히 회의적이었던 히파티아가 교황의 서재에 그려져 있는 그림에 등장한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매거진의 이전글 바바라 크루거 앞에서의 두 번째 허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