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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술호근미학 Dec 23. 2019

에로스 앞에서 부리는 첫 번째 허세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미술관에 간다

루브르 박물관에 가면 한국인에게 익숙한 회화가 한 점 있다. 바로 프랑수아 파스칼 시몬 제라드 (1770-1837)의 <프시케와 에로스>이다. 2006년 한불 수교 120주년 기념으로 국립중앙 박물관에서 루브르展을 열었는데, 당시의 광고 포스터가 이 그림이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53만여 명의 어마어마한 관람객들이 몰렸다고 하니 웬만해서는 이 그림을 한 번이라도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프시케와 에로스>(좌), <에로스의 키스로 되살아나는 프시케>(우)

또한 루브르 박물관에는 안토니아 카노바의 조각 작품인 <에로스의 키스로 되살아나는 프시케> 조각을 만날 수 있다. 이 에로스 그림 앞에서 장황하게 에로스와 프시케의 사랑 이야기를 해줄 수도 있지만, 어릴 적 만화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접한 여자 친구는 이미 그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럴 때는 에로스를 주제로 허세를 부려볼 수 있다.


미술관에는 왜 가요?

더 나은 삶을 위한 의지


"취미가 뭐예요?"

"저는 미술관에 가는 걸 좋아해요."

"미술관이요? 미술관에는 왜 가요?"
"음... 그게 좀 긴데..."


미술관에 자주 가지 않는 친구들은 나에게 묻는다. 왜 미술관에 가냐고.

그럴 때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대부분의 인간은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어 한다. 지금보다 금전적인 위기에 처하고 싶고, 건강이 악화되기를 바라고, 관계가 나빠지길 바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더 나은 것은 단순히 수적이나 질적으로 많거나 높은 것만은 아니다. 더 나은 것은 수적으로 지금의 것보다 많을 수도, 적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인기가 너무 많아 본인의 삶이 불가능한 톱스타는 어느 정도의 인기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은 것은 인간 본인이 원하는 가장 최적의 모습을 뜻한다. 더함도 부족함도 없는 그런 상태이다.


이 더 나은 삶은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것보다 나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현재 내 상태에서는 결여된 것이며, 갖고 있는 것보다 나은 것을 소망하는 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나는 더 나아지길 바라지 않아.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유지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아직 가지지 못한 것'이기에 이 또한 현재로써는 결핍된 것이고, 또한 나빠지는 미래보다는 더 나은 것이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인간은 자신에게 결핍되어 있고 아름다운(더 나은) 것을 욕망한다. 이 욕망은 영혼의 동력이 된다. 영혼의 충동, 용기, 이성을 지배하여 내가 생각하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의 삶을 향해 가까이 다가가게 한다. 이것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플라톤은 '에로스'라고 불렀다.


에로스


철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에로스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은 육체적 사랑이라고 할 것이다. 또는 고대 그리스 신들 중에 하나로써, 아프로디테의 시종이며 프시케의 남편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플라톤이 정의하는 에로스는 조금 다르다. 플라톤이 정의하는 에로스는 '현재 결핍되어 있는 특별한 어떠한 것을 원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에로스에 대한 플라톤의 의견은 그의 저서인 『향연』에 잘 나타나 있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에로스의 탄생 설화를 소개해 주고, 그로 인한 에로스의 특징을 소개한다. 에로스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생일날 잉태되었다. 아프로디테의 생일날 여러 신들이 모여 그녀의 생일을 축하했다.

그중 풍요와 술책, 방편의 신인 포로스 또한 참여를 했었는데, 포로스는 술을 너무 마셔 제우스의 정원에서 골아 떨어지고 말았다. 그때, 궁핍과 빈곤의 신인 페니아가 포로스를 발견하고 그와 관계를 맺게 되고, 에로스를 잉태하여 낳게 된다. 문제는 풍요의 신인 포로스와 궁핍의 신인 페니아와의 자식인 에로스는 이 둘 중에 어느 곳에도 완벽하게 속하지 않으며, 동시에 둘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플라톤은 다음과 같이 저술한다. 


사실 그는 아름다운 존재인 아프로디테의 생일 축하연을 계기로 태어났기 때문에, 본성상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었지요.
이렇듯 에로스는 포로스와 페니아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성격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첫째로 그는 언제나 결핍 상태에 놓여 있어서,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부드러움이나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답니다. 그러한 것과는 정반대로 그는 조아하고 더럽고 맨발로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며, 언제나 땅바닥 위에서 덮을 것도 없이 드러누워 있습니다. 또 남의 집 대문 앞이건 길가이건 가리지 않고 하늘을 이블 삼아 잠을 자는데, 그것은 그가 어머니의 본성을 이어받아 언제나 결핍과 함께하기 때문이랍니다. 반면에 그는 다른 한편으로 아버지의 성격도 이어받아 아름답고 훌륭한 것을 획득하기 위해 계획을 잘 꾸며내기도 한답니다. 그는 용감하기 때문에 진취적이고 전력투구하는 빼어난 사냥꾼이고, 끊임없이 계략들을 짜냄으로써 현명한 지혜를 얻고 새로운 수단을 개척해내며, 평생 동안 지혜를 탐구하며 삽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단한 협잡꾼이자, 마술사이며 소피스트이기도 하답니다. ...중략...
사실 지혜란 가장 아름다운 것 속에 있는 것이고 에로스는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에로스는 필연적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자일 수밖에 없고, 지혜를 사랑하는 한 그는 지자와 무지한 자의 중간자가 되는 셈이지요. 에로스가 그러한 성질을 지니게 된 원인은 그의 탄생에서 찾을 수 있답니다. 사실 그는 지혜롭고 모든 수단을 잘 쓸 줄 알는 아버지와 지혜롭지 못하고 어떠한 수단도 잘 알지 못하는 어머니로부터 태어났으니까요. 친애하는 소크라테스여! 바로 그러한 것이 이 정령 즉 에로스의 본성이랍니다. (Sym.203c-204b)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에로스의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아름다운 것을 사모하는 마음이며 두 번째는 바로 더 나은 것을 원한다는 것이다. 에로스는 아프로디테의 생일날 태어나, 당연하게도 아름다운 것을 사모하게 된다. 또한 그는 풍요와 빈곤의 중간자이기에 더 나은 것을 가지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이 두 가지는 사실 다른 것이 아니다. 지금의 삶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체험하고 나면, 지금의 삶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길 바란다. 그 아름다움은 항상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는 찾아내기 힘들다. 매일 똑같이 하던 일들을 반복하고, 평소에 가던 곳만 간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감조차 잡지 못한다. 영화 <트루먼쇼>에서 트루먼이 살고 있는 세트가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했다가 후에 그 모든 것이 세트였다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더 나은 삶을 찾으려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의 영역을 벗어나 볼 필요가 있다.


예술; 또 다른 세상과 만나는 방법


삶을 벗어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누군가는 직접 자신의 신체적인 위치를 변경하여 새로운 문화권으로 들어가는 여행을 하거나, 직업을 바꾸기도 한다. 이러한 것들은 평소 내가 접하지 않았던 환경 속에 나를 집어넣음으로써 직접적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행위이다.

그런가 하면 간접적이지만 다른 도구들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도 있다. 예술은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는 아주 강력한 도구이다. 모든 예술 안에는 작가의 치밀한 설계와 의도가 숨어 있다. 그 의도는 어떠한 문제에 대한 작가의 가치관이기도 하다. 예술을 마주하는 것은 바로 그 작가의 가치관과 마주하는 것이다. 예술은 여러 가지를 포함한다. 음악이나 영상, 문학, 미술 등등 수많은 장르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왜 하필 영화관이나 콘서트홀 또는 서점이 아니라 미술관인가? 


미술; 비폭력적으로 빠르게 작가의 의도를 전달하는 기술

예술들 중에서 특히, 미술은 덜 폭력적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게 해주는 도구이다. 음악이나, 영상은 굉장히 폭력적이다.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다면 그 음악은 내 귓속으로 바로 들어온다. 음악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거리를 두지 않고 스며든다. 또한 영상은 시각과 청각을 마비시킴으로 생각을 제한한다. 이러한 점에서 음악이나 영상은 굉장히 폭력적이다. 반면에 미술은 작품과의 거리를 둘 수 있고, 눈을 감아 차단할 수도 있다. 잠시 동안 시각과 청각을 차단한 채, 생각을 하다가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 미술은 음악과 영상에 비해 덜 폭력적이다.


또한 미술은 빠른 시간에 작가의 의도를 한 번에 파악할 수 있다. 비폭력적인 예술의 다른 한 장르는 바로 문학이다. 문학은 하나의 이야기 또는 시를 통해 다른 세상을 볼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런데, 문학책 한 권을 다 읽으려면 적어도 두, 세 시간을 쉬지 않고 읽어야 한다. 그에 반해, 미술은 작가의 의도를 한눈에 볼 수 있다. 그렇기에 미술은 다른 장르의 예술보다는 빠르게 작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다. 

즉, 미술관에 간다는 것은 작가의 설계와 의도가 들어간, 많으면 수천 가지가 되는 작품들을 대락 2시간 정도에 만나보는 경험인 것이다. 그것도 덜 폭력적이면서 빠르게 말이다. 이 경험들은 물론 지금의 내 삶과 비슷한 경험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한 번쯤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왜 이렇게 표현했을까?" 하는 질문을 가져다준다. 더 나아지고자 하는 의지, 즉 에로스를 충족시켜주는 행위인 것이다. 미술을 통해 형성된 질문은 내 삶에 적용이 되고, 그 적용된 것을 바탕으로 나는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변화한다. 나는 지금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하여 미술관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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