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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술호근미학 Jan 18. 2020

5. 중세의 미학, 기술자에서 예술가로

선 = 빛, 유출


중세 시대에 들어서며 기독교와 플라톤 사상은 혼합되기 시작한다. 세상에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선이 있다는 플라톤의 주장은 하나님이 세상의 가장 최고 선이며 절대미라고 하는 교부들의 사상과 일치한다. 특히 선은 빛과 같다는 플라톤적 인식이 기독교 교부들에 의해 발전되었다.『국가』6권에서 플라톤은 선을 태양에 비유한다. 

그러니까 태양은 '좋음'의 소산으로, 즉 '좋음'이 이것을 자기와 '유비 관계에 있는 것'으로서 생기게 했다고 내가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게나. 다시 말해, '좋음'이  '지성에 의해서 [라야] 알 수 있는 (지성에나 알려질 수 있는) 영역'에 있어서 지성과 지성에 알려지는 것들에 대해서 갖는 바로 그런 관계를 태양은 '가시적 영역'에 있어서 '시각'과 '보이는 것들'에 대래서 갖는다고 말일세' (Rep. 508c)

플라톤에 의하면 태양은 시각과 보이는 것들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를 인식하는 눈이 태양으로부터 넘쳐흐르는 것을 받듯 분배받아 그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빛이 없으면 눈은 너무 어두워서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눈은 태양으로부터 빛을 분배받은 것이다. 가시적 영역에 있어서 가장 최고가 되는 것은 태양인 것처럼, 선(善)도 절대적인 선에서부터 조금씩 분배(또는 유출된) 것이다. 좋음 중에서도 가장 이상적인 '좋음의 이데아'가 있다는 것이 플라톤의 주장이다. 이러한 사상들은 플로티누스에 의해 선이라는 것은 유출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플로티누스는 각각의 단계가 있고, 이 단계의 나래로 갈수록 태양에서 멀어져 빛의 유출이 조금 덜 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참고: 플로티누스의 미학 https://brunch.co.kr/@hogeunyum/73). 이후, 중세의 교부들 중 하나인 아레오파기타 사람 디오니시우스는 자신의 저서 중 신명론 부분에서 이러한 논증 방법에 기대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아름다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아름다운 것은 <절대미>라고 일컬어진다. 그 이유는 모든 사물들에 각각의 본질에 따라 다양하게 나누어 주는 특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빛과 같이 원래 광선의 상호 교통을 아름답게 만들면서 모든 사물들에 퍼져 나가는 조화와 광휘의 근본 원인이기 때문이며, 모든 사물들을 소환하여 (그로 인해 <공평함>이라는 이름을 부여받게 된다) 그 자신에게로 돌아가게 하기 때문이며, 모든 사물들을 상호 삼투의 상태로 끌어내기 때문이다. 


중세에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들에는 빛의 유출이 되어 있는 것처럼, 모든 사물에는 선의 유출이 되어 있다고 믿게 된다. 요하네스 스쿠토스 애리우게나는 모든 사물들은 하나님이 만든 것이기에 이러한 것들에는 빛의 유출이 되어 있고, 이 사물들을 통해 아랫단계부터 점차 체계적인 상승을 통해 하나님을 더 알아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의 신, 하나의 선, 하나의 빛이 만물들 속에 전파되어 만물들이 온전히 존재할 수 있게 되었고, 모든 사람들이 신의 미를 알고 사랑할 수 있도록 만물들 속에서 빛나며, 만물들이 훌륭히 번성할 수 있고 모든 것이 신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만물을 지배한다. 그래서 빛 중의 빛은 성부로부터 오는 것이다.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드는 예술가


중세에는, 사도바울이 고린도 전서 13장 12절의 개념이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진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린도 전서 13장 12절)


여기에서 바울은 아름다움(신성=선)에 대해 지금은 마치 거울로 보는 것처럼 아주 희미하지만, 결국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는 것처럼 선명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중세의 사람들은 선의 유출의 단계가 있음을 유추해낸다. 그리하여 감각적인 사물을 통해 선을 상기하기는 하지만, 단계를 뛰어넘어야만 그 아름다움을 더욱더 선명하게 알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단순히 눈으로만 보이는 사물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 안에 있는 의미와 하나님의 유출된 아름다움을 알아내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사물에 '기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가시적인 모든 사물들이 분명하게 우리에게 상징적으로 말할 때, 즉 그것들이 비유적으로 해석될 때, 비가시적인 의미와 말을 가리킬 수 있다....... 그것들의 미가 사물의 가시적인 형식 속에 있기에..... 가시적 미는 비가시적 미의 영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위그의 디오니시우스 『천상의 위계』에 대한 주석 중 6번째 챕터)

가시적인 모든 사물들에는 상징이 있고, 그 상징은 비가시적인 미를 알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비가시적인 미는 결국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때의 이미지는 단순한 이미지가 아닌 하나님을 알게 하는 방법의 수단이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중세에는 종교화들이 엄청나게 발달한다. 심지어 종교화 자체가 신성시되어 그것들을 통해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만날 수 있다는 이론까지 등장하게 된다. 동방정교회에서 사용하는 이콘들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지금도 동방 정교회 예배에 참석하면 이콘에 직접 입을 맞추고 기도하는 신도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상들 덕분에 예술가의 지휘는 단순한 기술자에서, 점차 하나님을 알게 해주는 인도자의 역할로 격상된다. 이러한 분위기 가운데,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예술가들은 신학, 철학, 과학, 인문학 등 다채로운 학문들을 접하게 된다. 특히 피렌체에서는 코시모 메디치의 후원에 의해 예술가들이 플라톤 아카데미와 메디치 도서관 등에 자주 왕래를 했고, 자연스럽게 신플라톤주의를 경험하게 된다. (참고: 코시모 메디치 https://brunch.co.kr/@hogeunyum/124).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통해 균형적인 소양을 갖추게 된 대표적인 예술가들이 바로, 브루넬리스키, 도나텔로, 조토, 미켈란젤로 등이다. 


그들은 점점 본인의 작업에 과학과 철학을 접목하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종교의 이야기를 우화, 이미지화했던 것들이 르네상스 시대에서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비례, 균형, 조화의 감각적 미를 갖추게 된다. 이에 따라 예술은 하나님을 알게 하는 도구로써 더욱더 각광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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