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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술호근미학 Oct 06. 2015

피카소는 무엇을 그리려고 했을까? - 후반부

#피카소, #유언, #조롱,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

→ 전반부에서 이어짐


그림에 대한 해석: 해석할 수 있으면 해석해 봐     


<게르니카>

이 때부터 평론가들은 피카소의 그림을 ‘해석’하기 시작한다. 피카소의 그림은 평론가들에게 있어 지적 허영심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평론가들은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잡지나 신문에 피카소의 그림을 앞 다투어 소개하고 이에 대한 멋들어진 해석을 내놓는다. 언뜻 보아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림을 기존의 철학과 자신의 견해를 내세워 해석한다. 부자들과 인기를 좇는 사람들은 사교를 위해서 피카소의 그림을 구입하고 그 해석들을 공부한다. 피카소의 그림을 이해하는 것은 어느 순간 교양 있고 지적능력을 갖춘 것으로 직결되었다. 


점점 비싸지는 피카소의 그림들

잡지와 신문에 피카소의 그림이 실리고, 사교계에 소개되면서 피카소의 그림 값은 천정부지로 솟구쳐 오른다. (피카소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 50개 중 7개를 그렸다.) 피카소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기괴한 그림들을 그려대고, 평론가들은 파격적인 그의 시도들에 대해 해석들을 추가한다. 마치 피카소가 파격을 시도하고 평론가들이 따라가는 듯한 추격전의 양상이 벌어진다. 그러던 중 몇몇 평론가들은 도무지 피카소의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여 이 레이스를 포기하기도 한다. 피카소의 그림에 대한 해석을 해낸 평론가들은 다른 평론가보다 지적 우위에 올라서게 된다.      


Picasso's Invitaion     


젊은 날의 피카소는 고전주의 풍의 그림들을 그렸다. 미술계에서는 그의 실력을 인정하기는 했으나, 다른 그림과 비슷한 그의 그림에 크게 주목하지는 않았다. (물론 고흐 같은 화가에 비하면 일찍 성공한 화가이긴 하다.) 피카소는 우연히 기존의 형태가 아닌 자신의 시각을 담은 그림을 그렸다. 파격적인 그림에 미술계는 그에 대한 태도를 바꿨다. 덕분에 부와 명예를 얻게 된 피카소는 미술계가 원하는 것은 ‘잘’그린 그림이 아닌 ‘파격’임을 깨닫는다. 그는 또 다른 파격들을 시도한다. 그리고 미술계는 그가 파격을 시도할 때마다 찬사를 보낸다. 피카소는 말년에 마네, 푸생, 벨라스케즈, 들라쿠루아 등의 선배 화가들의 작품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모방한다. 


마네와 들라크루아를 모방한 피카소의 작품


7살 어린애가 따라 한 것 같은 이 그림들조차도 평론가들은 세련된 언어로 해석한다. 피카소는 이를 비웃듯이 끝 없는 파격들을 시도한다. 

피카소는 기존에는 볼 수 없었던 작품을 보여줄 때에서야 자신에게 주목하는 미술계에 냉소를 지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끝 없이 파격을 시도하였고 어떻게든 그 파격을 따라가려는 사람들의 반응을 즐겼다. 1952년 5월 2일 마드리드에서, 이탈리아의 유명한 예술비평가인 조반니 파피니(Giovanni Papini)는 「리브로 네로」(Librio Nero)에서 피카소의 유언을 소개한다. 


예술이 더 이상 진정한 예술가들의 자양분이 될 수 없었던 뒤부터,
예술가들은 자기 재능을 자신의 환상이  만들어 내는 온갖 변화와 기분을 위해 사용했다.
지적 야바위꾼들에게는 온갖 가능성이 열려 있었으니까.
대중들은 예술 속에서 더 이상 위안도, 즐거움도 찾지 못했다. 그러나 세련된 사람들,
부자들, 무위도식자, 인기를 좇는 사람들은 예술 속에서 기발함과  독창성, 과장과 충격을 추구했다.
나는 내게 떠오른 수많은 익살과 기지로  비평가들을 만족시켰다.
그들이 나의  익살과 기지에 경탄을 보내면 보낼수록, 
그들은 점점 더 나의 익살과 기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오늘날 명성뿐만 아니라 부(富)도 획득하게 되었다.
그러나 홀로 있을 때면, 나는 나 스스로를 진정한 예술가로 생각하지 않는다.
위대한 화가는 조토(Giotto di Bondone)와 티치안(Tizuan),
렘브란트(Rembrandt)와 고야(Francisco de Goya) 같은 화가들이다.
나는 단지 나의 시대를 이해하고, 동시대의 사람들이 지닌 허영과 어리석음,
욕망으로부터 모든 것을 끄집어 낸 한낱 어릿광대일 뿐이다.


이에 대해 에프라임 키숀은 자신의 책「피카소의 달콤한 복수」(에프라임 키숀, 반성완 옮김, 마음산책, )에서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피카소는 결코 어릿광대가 아니었다. 그는 혼란스런 20세기를 신랄하게 비꼰 시대의 해설가이자 인간적인 어리석음을 수집한 위대한 기록가였다. 그는 실제로 서커스의 광대들을 사랑했다. 아마도 그에게 있어 삶 전체가 커다란 서커스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청색시대’의 서커스 그림들은 실제로 거장의 풍모를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조토나 티치안과 같은 대가처럼 그림을 그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그렇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는 하나의 위대한 원칙을 이해하기 전까지만 그러한 그림을 그리고 싶어했을 따름이다. 사람들이 자신만의 독자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 않고, 공예가적 능력을 더 이상 평가하지 않으며, 파격적인 것이나 억지로 꾸며 맞춘 이상한 것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또 그것을 통해 자신이 뭔가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고 상상하고 있다는 위대한 원칙을 깨닫고 나서는 전통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을 완전히 포기했던 것이다.
그러나 피카소는 진정으로 현명한 사람이었다. “나의 값진 시간을 이런저런 미학적 원론에다 허비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그는 자신에게 반문하면서 “선남선녀들이 그것을 기꺼이 원한다면, 코가 두 개 있는 여인이나 코 하나를 둘이 소유하고 있는 여인들을 그려 주지 못할 이유도 없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피카소는 정작 자신의 가족들은 단 지 한 개의 코만을 가진 사람들로 그렸고 또 전적으로 리얼리즘에 입각해서 그렸다. 그는 집에서는 일절 서커스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피카소는 지적 허영심에 목을 메는 평론가와 대중들을 자신이 계획한 추격전에 초대했다. 그는 초대되어진 이들에게 끊임없이 풀어내야할 숙제들을 던져 주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즐겼음이 틀림없다.


피카소는 무엇을 그리려고 했을까? 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은 피카소가 초대하는 추격전에 응하는 것이다.

피카소는 질문한다. 내가 과연 무엇을 그리려고 했을까? 이 초대에 당신도 응하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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