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마그리트 그림의 대상을 상징으로 바라봐야 하는가?
다시 군대 얘기다. 동생들(나는 군대를 29세에 갔다)이 르네 마그리트가 어떤 화가냐고 물었다. 때마침 읽고 있던 책이 김영하 소설가의 『빛의 제국』(관련 책 리뷰: https://brunch.co.kr/@hogeunyum/21)이었다. 나는 동기들에게 책의 표지를 보여줬다.
"이게 마그리트가 그린 그림이야. 어때?"
"잘 그렸네"
"이상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 "
"응? 뭐가??"
나는 그림이 잘렸기 때문에 동기들이 이상한 점을 못 느꼈다고 믿는다. 내가 만약 핸드폰이 있어서 그 자리에서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 연작의 제대로 된 그림을 보여줬다면 그들도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이 분명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걸그룹 의상이 달라진 건 그렇게도 잘 파악하던 놈들이...).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빛의 제국' 연작에서 하늘은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숲과 집, 호수는 깜깜한 밤이다. 이런 일들은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고 우리는 쉽게 "말이 안 되는 상황'이라고 말한다. 대체 르네 마그리트는 왜 이 '말이 안 되는 상황'들을 그림으로 그렸을까? 그의 그림에서는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면, 논리가 아닌 무엇으로 보아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초현실주의 작품들을 해석하면서 정신분석학을 끌어들인다.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활동하던 시기는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의 정신분석학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대두되던 시기였다. 많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프로이트의 무의식 세계에 대해 공감했고, 이를 기반으로 그림들을 그려나갔다. 그들은 마치 꿈에서 본 것 같은 모습들이나, 잠깐의 스쳐 지나가는 어떠한 '무의식적'인 상태에서의 기억을 되살려 그림을 그리곤 했다(이게 과연 가능할까?). 그들의 그림에서 드러나는 공통된 특징 중 하나는 대상의 왜곡이다. 초현실주의 대표 예술가인 달리와 이브 탕기의 그림에서 대상들은 실재와는 왜곡되어 표현되어 있다. 이는 그림에 그려진 형상들이 의식적으로는 인식할 수 없는 대상이고, 무의식의 한 장면을 포착해서 그렸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현세대의 바깥의 세계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이러한 점들은 초현실주의 작품들을 해석하는 데에 있어 정신분석학을 끌어들이는 것이 타당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마그리트의 그림은 대상을 왜곡하지 않았다. 그 대상이 무엇인지를 명징하게 구별할 수 있다. 그의 그림은 현실의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이 때문에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이 팝 아트에 영향을 끼친 듯하다). 이 점에서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은 '무의식적'으로 그려지지는 않았으며 상징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람자는 이브 탕기나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에서는 대상을 보며 '이것은 꼭 무엇처럼 생겼다'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마그리트의 그림에서는 '이것은 oo이다'라고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마그리트의 그림은 정신분석학이 아닌 어떤 방법으로 읽어볼 수 있을까?
근대에 이르러 예술은 더 이상 대상의 재현을 목적으로 가지지 않는다. 예술가는 스스로 창조하는 능력을 부여받았으며, 작품을 통해 그들의 정신적인 세계를 관람자에게 전달한다. 이제 예술에서의 문제는 ‘무엇을 그렸느냐’가 아니라 ‘왜, 어떻게 그렸느냐’가 되었다. 르네 마그리트 또한 자신의 작품을 통해 관람자들과 ‘자신의 사고’를 교류하고자 했다. 그를 직접 만나 그의 삶을 인터뷰한 수지 개블릭의 책에 의하면, 르네 마그리트는 스스로 미술가라는 이름을 거부했고, 자신은 ‘생각하는’ 사람이며 다른 이들이 음악이나 글로 생각을 나누듯이 자신 또한 회화로 자신의 사고를 교류한다고 밝혔다. 르네 마그리트가 교류하고자 했던 사고는 바로 논리적인 사고나 설명으로는 풀어낼 수 없는 두려움이었다. 마그리트는 원인과 결과를 연결하는 내적인 관계없이 사건을 인식한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함께 배치되어서는 마땅치 않을 만한 대상들이 한 공간에 존재한다. 많은 사람들은 다른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해석하듯이 르네 마그리트가 그린 대상들의 상징적 의미를 찾아왔고 그 의미들을 발견한다. 하지만 르네 마그리트는 이에 대해 격렬히 분노한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나의 그림을 상징주의와 동일시하는 것은 작품의 진정한 본질을 무시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물건을 사용할 때는 그 물건 속에서 상징적 의도를 찾지 않지만, 그림을 볼 때는 그 용도를 찾을 수 없고 회화를 접하면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의미를 찾게 된다… 상징적 의미를 찾는 사람들은 본질적인 시적 요소와 이미지의 신비함을 간과하게 된다. 아마도 이러한 신비함을 감지하게 되더라도 그것을 떨쳐 버리고 싶어 할 것이다. 그들은 두려워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라고 물음으로써 모든 일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만약 신비함을 거부하지 않는다면 완전히 다른 반응을 할 것이다. 다른 것을 묻게 될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의미를 찾으려고 사물을 본다면 그 사물 대신 상징으로 대치되는 어떠한 것만을 본다. 예를 들어 중세의 종교화에 등장하는 비둘기는 성령,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되면 사물 자체는 볼 수 없게 된다. 르네 마그리트가 회화를 통해 증명하고자 했던 자신의 사고는 이러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보이는 모습 그대로 대상을 바라보길 원했다.
이미지는 ‘있는 모습 그대로’ 보여야만 한다. 게다가 나의 그림은 보이는 것 이상의 경지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최고의 경지를 나타내지 않는다 (봉투 안에 감추어진 문자는 눈에 안 보이는 것이 아니다. 태양이 나무에 의하여 가려져 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정신은 미지의 것을 사랑한다. 정신의 의미 자체가 미지의 것이기 때문에 정신은 의미를 헤아릴 수 없는 이미지를 사랑한다. 정신은 그 자체의 ‘존재의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혹은 아는 것을 아는 이유를 납득하지 못하고서는) 제기된 문제들 또한 ‘존재의 이유’를 지니지 못한다.
위의 인터뷰에서 드러난 르네 마그리트의 철학으로 그의 작품을 바라볼 때, 대상을 눈에 보이는 이미지와는 다른 어떠한 상징으로 바라보는 것은 그의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회화 속에서 보이는 이미지 그대로의 의미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안에 있는 대상들이, ‘보이는 이미지 이외의 것을 상징한다’ 고 보기보다는 ‘이미지 자체로 어떻게 해석이 되는지’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정신분석학에서 이야기하는 무의식의 세계를 표현한 것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오히려 르네 마그리트가 그림에서 보여주는 초현실 세계는 라이프니치가 주장하였던 가능성의 세계에 가깝게 보인다. ‘가능성의 세계’는, 수많은 가능성의 세계들이 존재하고 그중에 가장 완벽한 하나의 세계가 바로 현재라는 것이다. 예술가는 완벽한 세계 이외의 가능성의 세계를 창조하며 표현해낼 수 있다. 르네 마그리트가 보여주고자 했던 초현실세계는 현재의 대상들이 가지는 기존의 정의와는 조금 다른 어떠한 가능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 가능 세계는 현재 세계와는 무엇인가 다른 세계이고 그 다름에서 인식되는 두려움에 대한 정신적 접근이 미를 만들어낸다. 이 점이 바로 르네 마그리트가 의도한 점이다.
현재 세계를 이루는 대상의 정의는 언어로써 이루어진다. 시인들이 그러했듯이 르네 마그리트는 언어에 대한 질서를 재배치함으로써, 자신이 추구하는 초현실 세계를 보여준다. 그의 이러한 작품들은 특히 1930년대 이후로 많이 드러난다. 그는 그림에 대상과 글씨를 함께 집어넣기도 한다. 그리고 관습적으로 인식되던 대상의 상호 관계를 뒤집어 보여주기도 한다. 이것은 한 마디로 '말이 안 되는 상황'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작업은 언어의 형식 파괴이다. 그렇다면 그 형식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이유로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세계는 언어학적으로 접근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