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 쪽부터 차례로 ‘살아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육체적 불가능성’, '천 년', '비벼 끈 사랑'
영국의 현대 예술가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 ‘살아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육체적 불가능성’이라는 작품에서 그는 상어의 사체를 포르말린 용액에 담가 대형 수족관에 넣다. 또한 '천 년'이라고 하는 작품에서는 한쪽에는 같은 공간에 방금 죽은 소의 머리와 수많은 파리 떼들을 집어넣고, 다른 쪽에는 해충 박멸 기계를 설치해서 그쪽으로 넘어오는 파리들이 죽는 기괴한 장치를 전시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비벼 끈 사랑'이라고 하는 작품에는 여러 종류의 담배꽁초들을 모아서 전시한다. 어떤 것은 필 때까지 다 핀 꽁초이지만, 어떤 것들은 담배를 태우는 중에 급하게 불을 꺼버린 듯한 그런 꽁초들도 있다.
데미안 허스트
많은 예술 평론가들은 데미안 허스트의 이 작품들이 죽음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먼저 포르말린 수조에 담긴 상어는 썩어서 없어질 자유를 탈취당한 영원한 사체이다. 인간은 죽음을 삶의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자연 전체에서 보면 죽음은 단순한 끝이 아닌, 새로운 것들의 창조이다. '천 년'에서 보다시피, 죽은 소의 사체는 수많은 파리떼들을 생산해내는 훌륭한 자원이다. 하지만 너무나도 많아진 파리 떼들은 인간에 의해 소멸돼버린다. 이렇게 생성과 소멸의 단계를 가짐으로써 균형을 이루는 것이 바로 자연이다. 우리는 영원한 삶을 꿈꾸지만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죽음은 내가 원하지 않는 그때에 올 수도 있다. 마치 처음엔 끝까지 다 피우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급한 일로 다 태우지 못한 채로 꺼져버린 담배꽁초처럼 말이다.
2. 그로테스크한 예술들의 힘
이렇게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에는 죽음에 대한 그의 철학이 담겨 있고, 이를 통해 관람자들은 죽음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갖게 된다. 그런데 그는 굳이 왜 ‘죽음’에 대해 다뤄야만 했을까?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형식이 이렇게까지 그로테스크해야만 할까?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예술들은 우리에게 쾌를 가져다준다. 완벽한 비율의 다비드 상이라든지, 눈 부시게 예쁜 비너스, 햇빛 쨍쨍한 밝은 날의 풍경화, 천국의 모습을 그려놓은 종교화 등등. 이렇게 기분 좋은 주제들도 있는데 말이다. 물론 그러한 아름다운 것들은 우리들에게 잠깐의 쾌를 선사하긴 한다. 하지만 정작 우리의 삶은 아름답게 표현된 그 작품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우리의 삶은 반드시 추한 면도 있고,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완벽한 비율의 조각상과 달리 우리의 몸은 비율이 망가져 있기도 하고, 선이 결국 승리는 수많은 희곡들과 달리 우리 삶에서는 권선징악이 이뤄지지 않는다. 결국 이러한 작품들은 잠깐 현실을 도피하게 만들고, 쾌감을 느끼겠지만 결국 삶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가져오진 못한다.
마치 현실과 동 떨어진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그것에 쾌감을 느끼기는 하지만 그건 그저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이야기라고 치부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현실에서 마주하기 고통스러운 주제들의 예술 작품은 현재 나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예를 들어 앞서 설명한 ‘죽음’이라는 주제는 모두가 가지고 있는 필연적인 것이다. 이렇게 공포스럽고 의문스러운 것들을 주시하게끔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그로테스크한 예술들이 가진 힘일 것이다. 이를 통해 내가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관점을 더욱 곤고히 할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사상을 깨버리고 새로운 관점을 가질 수도 있다. 먼저 관점을 곤고히 하게 되면 내 관점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고,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되면 우리는 스스로 이전보다 훨씬 나아졌다고 느낀다. 이전에는 고통스럽고, 모순적인 현실에 그저 순응하기만 하고, 회피하려고 했던 것들을 나름대로 극복하고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삶은 이전보다 더 풍요로워지고 힘이 넘치는 느낌을 얻게 될 것이다.
프란시스코 고야의 작품들
이처럼 예술은 단순히 저 세상에 존재하는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역할뿐 아니라
현실의 추하고 모순적인 모습들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삶을 더욱더 풍요롭게 하는 역할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프란시스코 고야나 데미안 허스트 같은 작가들이 인간 삶의 어둡고 공포스러운 점들까지도 예술의 주제로 삼은 까닭일 것이다.